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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평뉴스 대표 한우진 추석 인사말
오!양평뉴스 대표 한우진 추석 인사말 우리 조상님들 말씀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풍성한 결실로 모두가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양평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농협은행 양평군지부,양평군새마을회,양평군사회복지협의회,양평군생활개선회,대한적십자사 양평군봉사회,양평군자원봉사센터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군민에게 봉사하고 물품 후원하는 단체 회원들에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풀뿌리 지역 언론으로서 지역사회의 발전적 여론 형성과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데 노력하는 ‘오!양평뉴스’도 늘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를 시작하며 소망하신 일들 환한 보름달처럼 풍성하게 성취하시길 기원하며, 모든 군민 여러분들의 가정에 한가위처럼 희망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항상건강하십시요! 오!양평뉴스 대표 한우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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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청운면과 단월면 3·1만세시위는 3월 23일 용두리 장날 오후 3시 40분 경 용두리장터에서 일어났다. 판결문과 경찰, 헌병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는 이렇게 전개된다. 단월면 덕수리 출신 신재원(당시 60세) 지사와 단월면 향소리에 사는 정경시(당시 65세, 본적은 양동면 쌍학리) 두 지사는 청운면, 단월면 등지에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청운면 용두리장터로 가는 도중 단월면 부안리에 사는 김종학(당시 44세) 지사와 청운면 갈운리에 사는 민주혁(당시 50세) 두 지사를 만난다. 이에 만세운동의 목적을 알리고 권유하자 두 사람 모두 함께하기로 동의한다. 4명은 함께 여물리에 있는 다리 아래로 가서 밀담을 나눈 후 신재원 지사가 준비해 온 목면으로 깃발 3개를 만들고 거기에 김종학 지사가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글씨를 쓴다. 그 깃발 중 하나는 민주혁 지사가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할 목적으로 가슴에 품고 나머지는 신재원 지사, 김종학 지사가 하나씩 들고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에 도착한다. 이때 장터에 모여 있던 15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한다. 총독부와 헌병대 등의 보고서에는 용두리장터 시위는 천도교도가 중심이었고 학생과 예수교도, 보통민(일반인) 등이 참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폭행 등 폭력행위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3명을 강제 연행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이는 시위대가 시가행진을 하고 헌병과 충돌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구속된 네 명의 지사와 3월 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단월면 부안리 출신 곽영준(당시 21세) 지사 등은 모두 천도교도이다. 천도교 자료상으로 신재원은 천도교 양평교구 교구장이고 민주혁은 전교사(傳敎師)다. 곽영준 지사는 3·1운동 뒤 공선원(共宣員)에 피선된다. 나머지 두 분은 문서상 확인되지는 않는다(정용서의 글 <양평지역 3·1운동과 천도교> 참조). 향토사학자 이복재 선생은 "정경시 지사는 유림"이라고 확언한다. 정경시 선생 유사(遺事)를 보면 이 분은 독특한 삶을 산 분이다. 30대 때는 세 번이나 과거시험을 봤고 50대 때는 보통학교와 의숙(義塾)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65세 때 용두리장터 시위 주도, 67세 때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혐의 등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치열한 삶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가 단월면 향소리로 이사한 것은 1916년이었다. 향소리는 신재원 지사가 살고 있던 덕수리와 인접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궁금한 것은 천도교도냐 아니냐 보다 청운면 용두리 시위와 천도교 중앙과의 연계 여부다. 천도교 전체 차원에서 어떤 결의와 지시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고 간접적 정황은 많다. 3·1운동 준비 및 실행과정에 많은 천도교도들이 시위를 조직하거나 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그것이다(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을 냈던 천도교는 14명의 민족대표가 구속되고 1명은 도중에 사망하는 피해를 입는다. 3·1운동 뒤 천도교는 엄청난 탄압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이런 것을 볼 때 용두리장터 시위는 우연히 만나 결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한 것이 틀림없다. 이들 네 지사의 판결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피고 등은 천도교 교도로서 동교 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경성 기타 조선 각 지역에서 조선독립운동이 발발하고 있음을 들어 알자 피고 신재원, 정경시는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3월 23일 용두리 장날 만세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두 지사의 상고 이유를 읽어보면 이 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거사를 일으켰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글이 길어지니 부득이 이쯤에서 줄인다. 사진1: 3·1운동 당시 용두리 지도.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사진이다. 사진2: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아도총차랑(兒島惣次郞) 조선헌병사령관(朝鮮憲兵隊司令官) 보고서. 사진3: 여물리와 용두리를 잇는 여물교. 아마도 이 위치에 옛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4: 여물교 전경. 사진5: 용두리 삼거리 사진6: 단월면 덕수리 점골에 있는 신재원 지사 집터. 사진7: 향소리 교차로 모습. 정경시 선생이 1916년부터 1921년까지 거주한 향소리 사진8: 단월면 부안리 김종학 지사의 옛 집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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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 “내 동네는 절대 안돼?”
화장장, “내 동네는 절대 안돼?” 양평군이 70억을 투입해 오는 2023년 준공을 목표로 공설화장장을 추진한다. 좋은양평이제두 이에 따라 지난 7월, 지역대표와 전문가등이 참여한 ‘양평군 공설화장시설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10월26일부터 12월15일까지 공설화장시설의 최적 입지선정을 위한 건립후보지를 공개 모집하고 있다. 양평군에서는 이에 앞서 20여년 전부터 선출직에 출마하려는 후보는 물론, 양평군에서도 몇 차례에 걸쳐 화장장 건립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번번이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다. 화장장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내 동네는 절대 안돼!”라는 님비현상 때문이다. 이번에 양평군이 추진하는 공설화장시설은 부지면적 3만㎡ 내외로 화장시설(화장로5기, 연면적 3천㎡), 봉안시설, 자연장지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건립후보지 유치신청은 건립후보지 해당지역의 총 세대주 60%이상 찬성지역의 대표자가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최종후보지로 선정된 마을에는 마을발전기금 60억원(연차적지원)과 화장시설부대시설(식당, 매점, 장례용품 판매점, 카페 등)의 운영권 부여, 화장시설규모에 맞는 기간근로제 우선 채용 등의 인센티브가 제공되며, 유치지역 해당 읍·면민에 대해서는 화장수수료가 면제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장시설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전국 화장률은 지난 2014년 79.2%에서 2019년 88.4%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양평군의 화장률도 2014년 77.1%, 2018년 85.8%로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그러나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의 화장시설은 55개소에서 60개소로 5개소 증가하는데 그쳤다. 화장장수수료도 관내와 관외를 구분해 심하게 차등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성남시 화장장의 경우, 관내 주민은 5만원, 관외 사람들에게는 20배인 100만원을 받고 있다. 다른 지역 화장시설도 비슷한 수준이다. 양평군민들도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 원정화장을 치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원주, 성남, 춘천지역 화장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 양평군이 이번에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공설화장시설 등과 같은 혐오시설은 혜택은 전체가 골고루 누리지만, 부담은 주변 지역주민들에게 집중되는 게 혐오시설의 특징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가 사는 지역에 이러한 시설이 들어서는 데에는 반대하는 님비(NIMBY)현상을 넘어, 오히려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수익성 사업을, 자신의 지역에 유치하고자 하는 핌비(PIMBY)현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 기왕에 화장장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화장장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드리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이와 함께 20년 해묵은 사업을 추진하는데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추진하기 바란다. 좋은양평이제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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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3-(양평읍1) 양평읍(당시 갈산면) 양근리 만세시위는 3월 24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이날은 양평장날이었다.하루 전 경성(京城)을 출발해 양평에 온 연희전문학교 서기(書記) 이신규(20세)는 양근리장터 큰 도로에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 앞으로 다가가 연설을 시작한다."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틈 타 일본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다."대략 이러한 요지를 연설을 마친 그는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 명의로 된 <격문(檄文)> 수십 매를 품에서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격문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었다. "독립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의 깃발을 높이 올려 형벌 중에 있는 형제, 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촌단(寸斷)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자.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의 깃발을 나부끼며 용기 있게 일어나 독립하자!" 그런 뒤 이신규는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군중이 제각각 태극기를 꺼내더니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이때 용문면 삼성리에 사는 곽영준(21세)이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이신규를 돕는다(이신규와 곽영준은 가까운 친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최소한 미리 약속하고 움직였을 수도 있다. 천도교도인 곽영준은 전날(23일) 청운면 용두리장터 시위를 이끈 신재원의 사위이기도 하다. 곽영준은 단월면 부안리에서 태어났다).약 1,000명의 군중은 점차 열광적으로 바뀌어 갔고 이신규와 곽영준이 이끄는 대로 시장 안을 행진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시위가 무르익어 갈 즈음(오후 2시 40분 경) 일본 헌병 스즈키(鈴木)가 나타나 이신규와 곽영준을 체포해서 양평헌병분견소로 끌고가는 사태가 벌어진다.이에 격앙된 군중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헌병 한 명이 총을 겨눴다. 분견소 안으로 들어갔던 군중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한편 이날 집회에 동참했다가 크게 공감한 400여 명의 시위대는 자전거수리업을 하는 한창호(23세), 농업인 김경성(32세), 우편소사무원 서상석(19세), 요리점직원 김석봉(20세), 농업인 한봉철(22세. 이 분은 훗날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한다), 농업인 이용준(37세) 등이 선두가 되어 양평군청과 갈산면사무소, 양평우편소, 헌병분견소 등을 돌며 계속 시위를 벌인다.군청에는 약 50명의 시위대가 밀고들어갔으나 군수가 자리를 피해 도망간 것을 알자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갈산면사무소(현 양평읍사무소)로 이동해 면장 김찬제를 밖으로 끌어낸다. 면사무소에는 20~30명이 들어갔다(이들은 면장과 면서기 서병일에게 함께 만세 부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증인들은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 유리창 일부가 파손되고 면장 김찬제가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후 5시 경 의사로 추정되는 박희영의 집에 가서 군수와 면장을 찾아봤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신현은의 집으로 몰려간다. 결국 그곳에서 피신해 있던 군수와 면장을 찾아낸다. 그러자 시위대는 이 둘을 앞세우고 다시 헌병분견소로 간다(아마도 체포되어 구금된 이신규와 곽영준을 풀어달라는 요청에 군수와 면장을 앞세울 요량이었을 것이다).그러나 헌병들의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헌병들은 "고압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여기서 '고압적'이라는 것은 총검을 사용한 무력 진압을 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0여 명이 체포됐으며 그중 7명이 구속된다(이용준 지사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몰래 귀국해 전북 전주군 삼례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당일 사망한 사람은 2명이다. "친일 경찰 원수연이 양서면 정아무개 씨 포함 2명을 사살했다. 원수연은 친일한 공로로 광주(廣州)경찰서장을 역임하고 그 동생은 양평우체국장을 지냈다."(<양평3ㆍ1운동사> 132쪽 참조함).이날 시위는 저녁 늦게서야 끝났다. 한창호 지사의 판결문에는 이날 만세시위 참가자 수가 들쭉날쭉이다.곽영준 지사 부분에선 약 2,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쳤다 하고 한봉철 지사 부분에선 약 3,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치고 광분했다는 식이다. 어쨌든 이날 시위에는 성미(봉성리 마을), 원당리(현 원덕리), 회현리, 창대리, 오빈리, 도곡리 등 갈산면 각 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이 참가했다고 전한다.3월 24일 양근리 만세시위를 이끈 위 지사들의 면면에 대해서는 부득이 다음 회로 미룬다. 사진1. 당시 주요 시위지를 표시한 지도. 현재 위치와 많이 다르다. 헌병분견소 자리에는 양평경찰서가 있고 갈산면사무소 자리에는 양평군청이 있다.위 지도에 나오는 군청 자리는 현재 양평역 인근이고 우편소 자리는 양일고 인근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 지도의 정확성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판결문 중에는 우시장 인근에 갈산면사무소가 있다고 나온다. 사진2. 양평물맑은시장 안에 옛 양근리 장터가 있다. 사진3. 현재의 양평장터. 사진4. 옛 양근리장터 옆 큰길. 이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5. 큰길과 옛 장터를 잇는 길. 사진6. 양평삼거리. 사진7. 이신규, 곽영준 등의 판결문. 사진8.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보고서. 양평군 갈산면 만세시위 관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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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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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정동균군수 역할 컸다!
- 누가 뭐래도, 정동균군수 역할 컸다! 누가 뭐래도, 금번 양평-서울고속도로 예타 통과는 정동균군수의 역할이 컸다. 금번 양평-서울고속도로 예비타당성조사 통과는 12만 양평군민의 결집된 의지의 발로이며, 12만 군민과 함께 축하한다. 양평군의 사회단체가 중심이 되어 14,882명의 염원을 담은 서명부를 기재부에 전달함으로써 사업에 대한 군민의 열정을 보였다. 또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도 정동균군수의 역할이 컸다. 물론 국회의원, 도의원, 군의원, 그리고 실무 담당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표를 먹고 사는 선출직이 어찌 양평군민들이 염원하는 숙원사업을 등한시하겠는가! 그럼에도 정동균 군수의 역할이 돋보인 데는 그의 가장 큰 무기인 전방위적인 인맥을 1주일이 멀다 하고 굵직한 당정인사를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인맥 관리는 그가 평소 좋아하는 한자 숙어인 우보천리(牛步千里)에도 묻어난다. 결코 서두르거나 그렇다고 늦추지도 않으며, 꾸준하게 묵묵히 사람들을 만나고 관리를 해 온 탓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통했다고 보는 것이다. 보수적인 색채가 넘쳐나는 양평 땅에서, 그는 인기 없는 현 집권여당을 단 한번도 이탈한 적이 없으며, 묵묵하게 꾸준히 기회를 엿보며 출마를 거듭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양평군 수장을 꿰찼다. 금번 예타 통과는 손에 땀을 쥐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지난 9일, 기재부의 세종시 정부종합청사에서 재정사업평가위원회를 개최하기 전, 양평군청 로비에서 출정식과 함께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정동균 군수와 일행은 세종시로 향했다. 당초 ‘예타’는 22일에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8일이 경과한 30일에 발표했다. 마침내 ‘양평-송파고속도로 예비타당성조사 통과!’ 여세를 몰아 정동균군수는 전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기자회견장은 모두가 밝은 분위기였다. 당초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비용대비 편익(B/C)이 낮고, 수도권으로 분류되면서 부정적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평군민을 포함한 양평군의 적극적 건의로 정책성평가 부분에서 높게 평가돼 조사 통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양평 고속도로 개통시 교통량이 분산돼 상습 교통체증 구간이 일시에 해소될 것으로 보이며, 서울 강남권에서 양평까지의 이동 소요 시간도 20분 내로 단축될 계획이다 좋은양평 이제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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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정동균군수 역할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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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2(서종면)
- 신순봉의 양평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2양평지역3·1만세운동-1-(서종면1) 양평에서 3·1만세시위가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은 서종면이다. 3월 10일에 일어났다.서종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장터 시위를 이끈 천주교인 백낙기, 최학순 그룹이고 두 번째는 3월 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장터 만세시위를 공동으로 준비한 김영일, 김민현, 박중빈, 서정봉 등 그룹이다. (이번 첫 회는 문호리장터 시위에 대해 소개하고 두 번째 그룹의 행동은 다음번에 소개하기로 한다).비교적 일찍 서종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우선 한 가지를 꼽자면 주도자들이 천주교인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려졌다시피 3.1만세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세력이 주도했고 민족대표 33인은 이 세 종교의 지도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보다시피 천주교는 참여하지 않았다.그런데 서종에서는 천주교인이 주도했다.그렇다면 이것은 아마도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자발적 결의였을 가능성이 높다.당시 서종면 일대는 1907년에서 1910년까지 전개된 정미의병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익히 알려졌듯이 화서 이항로(1792~1868) 선생의 위정척사 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지역이었다.게다가 문호리나루터를 끼고 있어 한양과의 교류가 빈번하고 이 때문에 한양 소식을 빠르게 접하는 잇점이 있었다.이러한 요인들과 일찍부터 전파된 천주교 사상에 힘입어 천주교인들이 그 중심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문호리에 사는 천주교인 백낙기, 최학순(1895~?) 등이 사발통문을 돌려 주민들의 중지를 모았다 한다. "백낙기, 최학순 등은 천주교도로 지역 주민들을 규합해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문호리 소재 문상학교(현 서종초등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중략- 이날 시위군중은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날이 저물도록 독립만세 소리는 계속됐다. 왜경들이 들이닥쳐 총을 쏘며 횃불을 든 주민들 여러 명을 붙잡았다. 최학순은 경찰에 연행되어 양주헌병대(양주헌병분견소일 가능성이 높다)에 넘겨지고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일반적으로 장터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시간은 오후 1~2시 경일 터이니 미리 연통(連通)을 받고 온 주민들은 아마 이때쯤 문상학교에 모였을 것이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인일 가능성이 높다(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보고서에는 오후 6시 경 약 2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기도하여 곧바로 헌병이 해산시켰다고 나온다. 참가자는 주로 학생과 보통민(일반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다른 지역의 시위 양상을 보면 대체적으로 주도자 한두 명이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 후 거리행진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서종면 시위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문상학교를 나선 군중들은 우선 길가 바로 옆에 있는 서종면사무소 앞에서 큰 소리로 만세삼창을 또 했을 것이고 어쩌면 면사무소 직원들에게도 참가를 권유하거나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그런 뒤 문호교회 인근 장터를 향해 잠깐 행진을 하고 연설과 만세삼창을 이어갔을 것이다. 문상학교에서 장터까지는 불과 1백m 안팎이다. 그런데 해가 저물 때까지 시위를 이어간 것을 보면 시위대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문호리나루터와 서종우편소, 그리고 주재소 등을 두루 오가며 만세시위를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인용한 문헌을 보면 "왜경들이 들이닥쳐 총을 쏘며" 시위자들을 검거하면서 시위는 끝난다. 그러나 갈산면(현 양평읍) 시위 양상을 보면 이런 경우 양평헌병분견소에 군중들이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최소한 몇 사람이라도 남아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을 가능성 또한 남는다.'왜경(倭警)'은 일제강점기의 일본 경찰(순사)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인용 자료는 이날 시위를 진압한 주체를 왜경이라 했는데 이들이 왜경이었을지 일본군 헌병들이었을지는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헌병사령관 보고서에는 헌병 관할 소요지(憲兵 管轄 騷擾地)라고 기록되어 있다.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朝鮮總督府 警務總監部 高等警察課) 보고서는 "동지[문호](同地[汶湖]) 헌병이 해산시켰다"고 보고하였다. 사진1 사진2 사진3 사진4 사진5 사진6 사진7 사진1: 서종초등학교(옛 문상학교 터). 사진2: 문호교회 앞 사거리. 사진3: 옛 문호교회. 1905년에 건립되어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5년에 다시 지었다. 사진4: 문호교회 앞 도로. 이곳에 문호리 장이 섰다. 사진5: 문호리성당 전경. 3·1운동 당시에는 본당이 아닌 공소(公所)였다. 사진6: 현재의 문호리나루터 모습. 사진7: 3·1운동 당시 문호리 부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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