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기고
-
오!양평뉴스 대표 한우진 추석 인사말
오!양평뉴스 대표 한우진 추석 인사말 우리 조상님들 말씀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풍성한 결실로 모두가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양평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농협은행 양평군지부,양평군새마을회,양평군사회복지협의회,양평군생활개선회,대한적십자사 양평군봉사회,양평군자원봉사센터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군민에게 봉사하고 물품 후원하는 단체 회원들에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풀뿌리 지역 언론으로서 지역사회의 발전적 여론 형성과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데 노력하는 ‘오!양평뉴스’도 늘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를 시작하며 소망하신 일들 환한 보름달처럼 풍성하게 성취하시길 기원하며, 모든 군민 여러분들의 가정에 한가위처럼 희망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항상건강하십시요! 오!양평뉴스 대표 한우진 올림
-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청운면과 단월면 3·1만세시위는 3월 23일 용두리 장날 오후 3시 40분 경 용두리장터에서 일어났다. 판결문과 경찰, 헌병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는 이렇게 전개된다. 단월면 덕수리 출신 신재원(당시 60세) 지사와 단월면 향소리에 사는 정경시(당시 65세, 본적은 양동면 쌍학리) 두 지사는 청운면, 단월면 등지에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청운면 용두리장터로 가는 도중 단월면 부안리에 사는 김종학(당시 44세) 지사와 청운면 갈운리에 사는 민주혁(당시 50세) 두 지사를 만난다. 이에 만세운동의 목적을 알리고 권유하자 두 사람 모두 함께하기로 동의한다. 4명은 함께 여물리에 있는 다리 아래로 가서 밀담을 나눈 후 신재원 지사가 준비해 온 목면으로 깃발 3개를 만들고 거기에 김종학 지사가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글씨를 쓴다. 그 깃발 중 하나는 민주혁 지사가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할 목적으로 가슴에 품고 나머지는 신재원 지사, 김종학 지사가 하나씩 들고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에 도착한다. 이때 장터에 모여 있던 15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한다. 총독부와 헌병대 등의 보고서에는 용두리장터 시위는 천도교도가 중심이었고 학생과 예수교도, 보통민(일반인) 등이 참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폭행 등 폭력행위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3명을 강제 연행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이는 시위대가 시가행진을 하고 헌병과 충돌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구속된 네 명의 지사와 3월 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단월면 부안리 출신 곽영준(당시 21세) 지사 등은 모두 천도교도이다. 천도교 자료상으로 신재원은 천도교 양평교구 교구장이고 민주혁은 전교사(傳敎師)다. 곽영준 지사는 3·1운동 뒤 공선원(共宣員)에 피선된다. 나머지 두 분은 문서상 확인되지는 않는다(정용서의 글 <양평지역 3·1운동과 천도교> 참조). 향토사학자 이복재 선생은 "정경시 지사는 유림"이라고 확언한다. 정경시 선생 유사(遺事)를 보면 이 분은 독특한 삶을 산 분이다. 30대 때는 세 번이나 과거시험을 봤고 50대 때는 보통학교와 의숙(義塾)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65세 때 용두리장터 시위 주도, 67세 때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혐의 등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치열한 삶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가 단월면 향소리로 이사한 것은 1916년이었다. 향소리는 신재원 지사가 살고 있던 덕수리와 인접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궁금한 것은 천도교도냐 아니냐 보다 청운면 용두리 시위와 천도교 중앙과의 연계 여부다. 천도교 전체 차원에서 어떤 결의와 지시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고 간접적 정황은 많다. 3·1운동 준비 및 실행과정에 많은 천도교도들이 시위를 조직하거나 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그것이다(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을 냈던 천도교는 14명의 민족대표가 구속되고 1명은 도중에 사망하는 피해를 입는다. 3·1운동 뒤 천도교는 엄청난 탄압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이런 것을 볼 때 용두리장터 시위는 우연히 만나 결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한 것이 틀림없다. 이들 네 지사의 판결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피고 등은 천도교 교도로서 동교 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경성 기타 조선 각 지역에서 조선독립운동이 발발하고 있음을 들어 알자 피고 신재원, 정경시는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3월 23일 용두리 장날 만세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두 지사의 상고 이유를 읽어보면 이 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거사를 일으켰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글이 길어지니 부득이 이쯤에서 줄인다. 사진1: 3·1운동 당시 용두리 지도.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사진이다. 사진2: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아도총차랑(兒島惣次郞) 조선헌병사령관(朝鮮憲兵隊司令官) 보고서. 사진3: 여물리와 용두리를 잇는 여물교. 아마도 이 위치에 옛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4: 여물교 전경. 사진5: 용두리 삼거리 사진6: 단월면 덕수리 점골에 있는 신재원 지사 집터. 사진7: 향소리 교차로 모습. 정경시 선생이 1916년부터 1921년까지 거주한 향소리 사진8: 단월면 부안리 김종학 지사의 옛 집터. .
-
화장장, “내 동네는 절대 안돼?”
화장장, “내 동네는 절대 안돼?” 양평군이 70억을 투입해 오는 2023년 준공을 목표로 공설화장장을 추진한다. 좋은양평이제두 이에 따라 지난 7월, 지역대표와 전문가등이 참여한 ‘양평군 공설화장시설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10월26일부터 12월15일까지 공설화장시설의 최적 입지선정을 위한 건립후보지를 공개 모집하고 있다. 양평군에서는 이에 앞서 20여년 전부터 선출직에 출마하려는 후보는 물론, 양평군에서도 몇 차례에 걸쳐 화장장 건립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번번이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다. 화장장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내 동네는 절대 안돼!”라는 님비현상 때문이다. 이번에 양평군이 추진하는 공설화장시설은 부지면적 3만㎡ 내외로 화장시설(화장로5기, 연면적 3천㎡), 봉안시설, 자연장지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건립후보지 유치신청은 건립후보지 해당지역의 총 세대주 60%이상 찬성지역의 대표자가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최종후보지로 선정된 마을에는 마을발전기금 60억원(연차적지원)과 화장시설부대시설(식당, 매점, 장례용품 판매점, 카페 등)의 운영권 부여, 화장시설규모에 맞는 기간근로제 우선 채용 등의 인센티브가 제공되며, 유치지역 해당 읍·면민에 대해서는 화장수수료가 면제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장시설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전국 화장률은 지난 2014년 79.2%에서 2019년 88.4%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양평군의 화장률도 2014년 77.1%, 2018년 85.8%로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그러나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의 화장시설은 55개소에서 60개소로 5개소 증가하는데 그쳤다. 화장장수수료도 관내와 관외를 구분해 심하게 차등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성남시 화장장의 경우, 관내 주민은 5만원, 관외 사람들에게는 20배인 100만원을 받고 있다. 다른 지역 화장시설도 비슷한 수준이다. 양평군민들도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 원정화장을 치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원주, 성남, 춘천지역 화장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 양평군이 이번에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공설화장시설 등과 같은 혐오시설은 혜택은 전체가 골고루 누리지만, 부담은 주변 지역주민들에게 집중되는 게 혐오시설의 특징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가 사는 지역에 이러한 시설이 들어서는 데에는 반대하는 님비(NIMBY)현상을 넘어, 오히려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수익성 사업을, 자신의 지역에 유치하고자 하는 핌비(PIMBY)현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 기왕에 화장장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화장장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드리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이와 함께 20년 해묵은 사업을 추진하는데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추진하기 바란다. 좋은양평이제두 칼럼
-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3-(양평읍1) 양평읍(당시 갈산면) 양근리 만세시위는 3월 24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이날은 양평장날이었다.하루 전 경성(京城)을 출발해 양평에 온 연희전문학교 서기(書記) 이신규(20세)는 양근리장터 큰 도로에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 앞으로 다가가 연설을 시작한다."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틈 타 일본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다."대략 이러한 요지를 연설을 마친 그는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 명의로 된 <격문(檄文)> 수십 매를 품에서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격문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었다. "독립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의 깃발을 높이 올려 형벌 중에 있는 형제, 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촌단(寸斷)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자.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의 깃발을 나부끼며 용기 있게 일어나 독립하자!" 그런 뒤 이신규는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군중이 제각각 태극기를 꺼내더니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이때 용문면 삼성리에 사는 곽영준(21세)이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이신규를 돕는다(이신규와 곽영준은 가까운 친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최소한 미리 약속하고 움직였을 수도 있다. 천도교도인 곽영준은 전날(23일) 청운면 용두리장터 시위를 이끈 신재원의 사위이기도 하다. 곽영준은 단월면 부안리에서 태어났다).약 1,000명의 군중은 점차 열광적으로 바뀌어 갔고 이신규와 곽영준이 이끄는 대로 시장 안을 행진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시위가 무르익어 갈 즈음(오후 2시 40분 경) 일본 헌병 스즈키(鈴木)가 나타나 이신규와 곽영준을 체포해서 양평헌병분견소로 끌고가는 사태가 벌어진다.이에 격앙된 군중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헌병 한 명이 총을 겨눴다. 분견소 안으로 들어갔던 군중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한편 이날 집회에 동참했다가 크게 공감한 400여 명의 시위대는 자전거수리업을 하는 한창호(23세), 농업인 김경성(32세), 우편소사무원 서상석(19세), 요리점직원 김석봉(20세), 농업인 한봉철(22세. 이 분은 훗날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한다), 농업인 이용준(37세) 등이 선두가 되어 양평군청과 갈산면사무소, 양평우편소, 헌병분견소 등을 돌며 계속 시위를 벌인다.군청에는 약 50명의 시위대가 밀고들어갔으나 군수가 자리를 피해 도망간 것을 알자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갈산면사무소(현 양평읍사무소)로 이동해 면장 김찬제를 밖으로 끌어낸다. 면사무소에는 20~30명이 들어갔다(이들은 면장과 면서기 서병일에게 함께 만세 부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증인들은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 유리창 일부가 파손되고 면장 김찬제가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후 5시 경 의사로 추정되는 박희영의 집에 가서 군수와 면장을 찾아봤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신현은의 집으로 몰려간다. 결국 그곳에서 피신해 있던 군수와 면장을 찾아낸다. 그러자 시위대는 이 둘을 앞세우고 다시 헌병분견소로 간다(아마도 체포되어 구금된 이신규와 곽영준을 풀어달라는 요청에 군수와 면장을 앞세울 요량이었을 것이다).그러나 헌병들의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헌병들은 "고압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여기서 '고압적'이라는 것은 총검을 사용한 무력 진압을 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0여 명이 체포됐으며 그중 7명이 구속된다(이용준 지사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몰래 귀국해 전북 전주군 삼례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당일 사망한 사람은 2명이다. "친일 경찰 원수연이 양서면 정아무개 씨 포함 2명을 사살했다. 원수연은 친일한 공로로 광주(廣州)경찰서장을 역임하고 그 동생은 양평우체국장을 지냈다."(<양평3ㆍ1운동사> 132쪽 참조함).이날 시위는 저녁 늦게서야 끝났다. 한창호 지사의 판결문에는 이날 만세시위 참가자 수가 들쭉날쭉이다.곽영준 지사 부분에선 약 2,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쳤다 하고 한봉철 지사 부분에선 약 3,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치고 광분했다는 식이다. 어쨌든 이날 시위에는 성미(봉성리 마을), 원당리(현 원덕리), 회현리, 창대리, 오빈리, 도곡리 등 갈산면 각 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이 참가했다고 전한다.3월 24일 양근리 만세시위를 이끈 위 지사들의 면면에 대해서는 부득이 다음 회로 미룬다. 사진1. 당시 주요 시위지를 표시한 지도. 현재 위치와 많이 다르다. 헌병분견소 자리에는 양평경찰서가 있고 갈산면사무소 자리에는 양평군청이 있다.위 지도에 나오는 군청 자리는 현재 양평역 인근이고 우편소 자리는 양일고 인근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 지도의 정확성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판결문 중에는 우시장 인근에 갈산면사무소가 있다고 나온다. 사진2. 양평물맑은시장 안에 옛 양근리 장터가 있다. 사진3. 현재의 양평장터. 사진4. 옛 양근리장터 옆 큰길. 이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5. 큰길과 옛 장터를 잇는 길. 사진6. 양평삼거리. 사진7. 이신규, 곽영준 등의 판결문. 사진8.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보고서. 양평군 갈산면 만세시위 관련 부분.
-
- 뉴스
- 문화
- 문화일반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실시간 기고 기사
-
-
양평군 전의원 김덕수 기고문
- 양평군 전의원 김덕수 기고문 박근혜 탄핵과 맞물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제인 정권에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감은 어느 정권에 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높았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평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취임사는 온 국민을 감동시켰고 이제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국민적 지지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조국 사태를 바라보면서, 선거법, 공수처법을 강행처리하고 심지어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국민만 바라보며 불철주야 일만하는 검찰을 자신들의 권력유지라는 잣대로 난도질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을 개, 돼지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평등이고, 공평이고, 정의인가? 문재인 정권이 국민을 두려워한다면 더 이상의 국민과 소통 없는 독재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국민적 재앙이다. 지난 지방선거를 통해 양평도 군민혁명이라 할 만큼 역사적인 변화가 있었다. 지방자치 이래 20여년 만에 민주당 정동균 군수가 당선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정동균 군수는 스스로 “새벽에 일어나 보니 당선된 새벽군수다.”라고 이변을 수없이 역설했다. 때문에 정동균 군정에 걸고 있는 군민들의 기대와 관심은 그 어느 때 보다 크고 깊었다. 인수위원회 구성할 때도 위원들 구성과 결과물에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인수위원 구성부터 양평을 잘 모르는 외부인사 위주로 구성하는 석연찮은 생각이 들었고 인수위 결과물도 발표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발표한 것이 당초 기대와는 달리 아주 실망스럽고 내용이 없는 저조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시작은 미약해도 군민들의 기대는 양평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군민들의 뜻을 물어 해결하리라 생각 했다. 임기 2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지금의 양평군정의 모습을 보자. 무엇하나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것이 있는가? 양평군민들은 정동균 군정을 통해 과연 얼마나 행복을 느낄까? 군민의 한 사람으로, 한때 야인시절 정동균 군수와 머리를 맞대고 양평의 앞날을 고민하고 걱정했던 사람으로서 작금의 군정에 대해 실망과 분노를 감출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설사 군수 생각의 한계가 있어도 그렇지, 양평의 민주당과 측근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많은 군민들의 비소 섞인 말과 분노와 원망의 소리를 듣지도 못하는가? 때문에 정동균 군수가 내건 “바르고 공정하고 행복한 양평”은 길을 잃은 고아가 됐다고 말하는 군민들의 이유가 상당하다. 첫째, 양평공사 사장 채용과정이 바르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채용했는가? 채용당시에 이재명도지사가 보낸 낙하산 인사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 결과도 역시 같았다. 세미원 사장 채용은 바르고 공정하게 했는가? 이 또한 외부 정치인 아닌가? 왜 검증도 안 된 성남 정치인을 양평군민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나? 양평공사 사장과 세미원 사장 채용과정에서 투명하고 공정하지 못한 미리 선정한 낙하산 인사라는 인사채용비리에 대한 항간의 의혹을 정동균 군수는 군민 앞에 낱낱이 밝혀야 한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양평공사문제의 해법보다는 전임 군수의 잘못만 탓하며 책임론을 앞세워 정치적인 상처를 주어 4월 총선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환자가 위급해 병원에 갔는데 담당의사가 환자에게 전직 의사가 왜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았나? 고 환자를 야단치고 전직 의사 핑계만 대며 과거 타령이나 하고 긴급처방을 안하고 방치할 때 과연 그 환자가 살아 날 수 있겠는가? 만약 긴급 처방과 수술을 안 해서 그 환자가 죽었다면 가장 큰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전직 의사인가? 긴급처방과 수술을 안 한 의사인가?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하다. 지금의 양평군정의 모든 부실행정과 무능의 책임은 정동균 군수와 민주당에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군수 관용차를 수백만원을 들여 불법개조해서 운용해 감사에 걸려 여러 언론을 통해 양평군을 망신스럽게 했다. 나라경제가 엉망이고 특히 양평에는 건설 주택경기가 없어 중장비들이 일거리가 없어 대부분 쉬고 있고, 자영업자들이 불경기에 하루하루를 어떻게 먹고 살아야하나? 깊은 한숨을 쉬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가는데 정작 군수는 관용차에 군민의 혈세로 공기청정기를 설치하고 불법개조를 하는 파렴치함을 보여 주었다. 셋째, 공직자 인사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완전히 상실한 인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양평군정 역사상 처음으로 공직자 노조가 불공정인사라는 성명서를 통해 정군수의 행태를 비난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바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넷째, 최초로 민간인 양평군 체육회장 선거에 특정인물을 세 번씩이나 찾아가 회장직을 제안하는 직권남용 불법을 저질렀다. 이는 엄연한 공권력을 동원한 선거개입으로 정식으로 수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군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새벽에 이변으로 당선 되었을 때 그때 초심으로 돌아가 모든 군정업무에서 군민의 마음을 하나하나 담고 군민의 마음을 항상 헤아려 공직자들과 소통하여 성공적인 군수가 되기를 마지막으로 바란다. 양평군민은 그리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정동균 군수와 민주당은 명심 하기를 바란다. 군정질서가 지켜지는 그날까지 양평군을 위하여 군민과 함께 위대한 저항은 김덕수가 계속 할 것이다. 전 양평군의원 김덕수 오!양평뉴스 입장상기 기고문은 개인의 의견으로 오!양평뉴스의 입장이 아닙니다. 누구든 양평군을 위해 기고를 원하시는 분은 자구 수정없이 게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누구든 자유롭게 기고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양평군 전의원 김덕수 기고문
-
-
맹주철 기고
- 양평의 교육 지표에 대해 알아보고 양평교육의 미래를 위해 국제화교육을 제안하며 기고내용은 총3회에 걸쳐 게재 할 예정이다. 1. 양평에 정착하는 인구 변화는 20/30/40대가 늘고 이루며 특히 40대의 변화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 양평을 찾는 여러 요인 환경/ 주거/ 교육/ 경제 중 20~40대의 욕구는 교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된다. 3. 학생 수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교육의 필요성으로 인해 양평을 찾은 유입인구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양평을 떠나고 있다.
-
- 오피니언
- 기고
-
맹주철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