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기고
-
양평공사 부채 350억 군민의 혈세로 상환
양평공사 부채 350억 군민의 혈세로 상환“무능, 무지. 무책임, 고소, 고발로 얼룩져버린 양평공사” 김덕수이사장 “양평공사의 부실경영 군민에게 책임전가” 양평공사는 농산물 유통, 환경기초시설 운영, 관광지 조성·관리, 체육시설 조성·관리 등이 주요 사업이다. 그러나 부실 경영으로 2019년 말 기준 누적 결손금은 332억원, 자본잠식률은 90.2%에 달했다. 양평군 관계자는 양평공사에서 적자 폭이 큰 친환경농산물 유통 분야를 양평농협에 넘기고 나머지 분야는 시설관리공단을 설립해 업무를 이관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의회에서 반대해 차질을 빚게 됐다"며 탓을 돌리고 있다. 이여서 “그동안의 양평공사의 부채를 양평군에서 상환하게 된 상황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다. 말도 안 되며 한심한 얘기다. 무엇이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지 이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또한 이들이 공사에서 공단으로 전환하려고 왜 애쓰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누구를 위한 양평군이고 누구를 위한 양평공사인가?” 공사와 공단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공통사항은 국가가 최대의 주를 보유하고, 공공성의 목적을 갖는다. 차이점은 공사는 공공성과 이익창출 두가지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공익적 경제수요를 충족하는 것이다. 정부가 출자한 자본에 따라 정부투자기관(50%이상), 정부출자기관(50%이하)로 나뉘지며 전자에는 한국전력, 한국도로공사 등이며 후자는 가스공사, 인천국제공항, 한국전력기술공사 등이 있다. 공단은 국가행정기관이 하는 사업 중 특수하거나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법인화된 행정기관)를 하며 이익보다 공익적 행정의 효율성을 목적으로 한다. 정부의 비대를 막고 행정의 효율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건설교통부 산하 교통안전공단,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보험공단과 국민연금공단이 있다. 양평공사를 공단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뻔하다. 군의 입장에서는 능력의 한계를 표출한 것이고 공사 관계자들은 수익사업 안 하고 관리만 하고 돈만 받고 싶은 것이다. 수익사업 하기에는 능력이 없고 그냥 관리만 하면서 월급 받는 정년이 보장된 요즘 말로 개꿀인 것이다. 그동안의 누적된 빚(350억원 중 150억은 작년에 이미 상환 함)은 군민의 세금으로 변제하고 나면 공단으로 전환해서 그 직원 그대로 그 사장 그대로 이어간다는 것에 군민들이 납득이 가겠는지 묻고 싶다. 부패는 부패를 낳는다. 이름만 바뀌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군수의 임기가 다 되어가는 4년 차에 고작 공사에서 공단 전환이라는 정책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첫째, 무능경영자의 부실경영. 양평공사 사장 박윤희의 자질도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성남 정치인을 낙하산 인사로 임명한 사유를 양평군수는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낙하산 인사가 왠 말인가? 전문성도 없는 인사를 사업체인 양평공사 사장으로 취임시키고 끊임없는 지역 불난의 불씨가 되고 있다. 양평공사 사장이 군의원을 고소하고, 사장의 무능함과 사건화된 문제에 대해 양평군의회에서 공사 사장 직위해제를 의결해서 군수에게 보냈는데 아직도 아무 조치도 안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이 의원을 고소하는 촌극을 일삼는 사장을 두둔하고 인사 조치를 안 하고 있는 무능 행정은 군민들을 무시하는 행위로 밖에 볼 수 없다. 양평군과 공사 사장이 유능 했으면 지금의 이모양 이꼴이 되었겠는가?도대체 누구를 위한 군정이고 양평공사인가? 둘째, 모두 갈아치우자! 양평공사 나름대로 ‘경영혁신’이라는 공모전까지 기획했다면 공단 전환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에서의 ‘혁신’이 맞는 것이지 새로 이사 간 집에서 무슨 혁신을 한다는 것 인가? 그리고 양평공사의 “경영혁신”은 지금의 비(非)전문경영진들이 사퇴하고 새로운 전문경영인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이 “혁신의 시작”이다. 지금의 양평공사를 낳은 장본인들 모두 윗선들이다. 말단 직원들은 일만 한 죄이다. 윗선은 부서장 위부터가 윗선들이다. 소신(所信) 것 일하면 안 되는 회사분위기가 지금의 사단(事端)을 초래했다. 그런 점에서 양평군과 양평공사는 닮은 점이 많다. 첫째 사업(군정)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둘째 유능한 직원을 활용 못하고(인사관리), 셋째 리더쉽의 부재이다. 지금부터라도 양심선언 좀 하자. 양평공사가 정상인가? 능력이 없으면 물러나야 한다. 왜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남에게 전가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빚은 빚대로 군민의 세금으로 탕감하는 것 자체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비상식적이지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사에서 공단으로 전환하는 것이 이치에 옳다고 생각하는가! 13년이라는 세월 속 우여곡절 끝에 양평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온다. 다행이다. 양평공사는 누구의 것도 아닌 군민의 것이다. 설립비용이 군민의 세금으로 설립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에 “너희 월급(세금)은 우리가 준다.”라는 말이 있다. 공무원들도 세금 내고 있으니 자기도 군민이라고 한다. 틀리지 않다. 하지만 세금으로 월급 받는 금액에서 세금을 내니 조금은 온도 차이가 있다. 말장난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공무원은 군민을 대신해서 양평군의 군정을 위탁받은 자들이다. 이 점은 명심해두자 예산을 즉, 돈을 집행한다고 해서 ‘갑’은 아니다. 군정 예산의 출처는 분명 군민의 세금이다. 간혹 망각하거나 착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군수도 선출직으써 군민을 대표해 임기 동안 군정을 위탁받은 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양평공사 임·직원 모두 지역을 위해 일해야 하는 목적이 있다. 정관에도 있는 내용이다. 옳다고 생각하면 말단 직원이라도 직언해야 한다. 소명의식을 갖자. 몇 년 동안의 누적적자임에도 퇴직금과 월급은 정해진 날짜에 지급되었을 것이다. 셋째, 결론적으로 “양평공사는 존속”되어야 한다. 얼마든지 양평공사는 회생 가능성이 열려있다. 현재 양평은 5,000세대 아파트가 건설 중이고 도시개발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 양평공사가 도시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수익사업을 할 수 있고 그 수익으로 부채를 충분히 갚을 수도 있는데 위기를 기회로 삼지 않고 그저 공단 전환이라는 정책 카드는 일을 안 하겠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농산물유통사업분야를 양평농협으로 이관된 지금의 양평공사는 시설관리 공단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공단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명분은 유통 분야의 30명 고용 승계와 부채 청산인데 공사에서 도시개발을 특화사업으로 전환 시키면 30명 고용승계도 되고 수익사업을 통해 부채도 청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양동면의 공단시설, 물류단지도 공사를 통해 할 수 있다. 지역의 아파트 건설도 공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데 무조건 안 된다는 사고를 가진 무능한 공사의 경영진을 교체하고 새롭게 경영혁신 할 수 있는 인재를 철저한 검증을 통해 외부에서 영입해야 공사가 새롭게 태어난다. 구구절절 할 말은 많이 있지만 말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 초심으로 돌아가자. 처음 입사 때 일을 기억하자. 정말 진심으로 양심에 호소하고 바른길을 찾기 위해 함께 하자. 이제 그동안의 일보다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자.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각자 잘 알고 있다. 내려 놓으면 편해진다. 현명한 판단이 기다려지는 나날이다. 양평공사 정상화를 위한 “인디언의 기우제”도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All Life 평생양평”<양평경제발전연구소 이사장 김덕수>
-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청운면과 단월면 3·1만세시위는 3월 23일 용두리 장날 오후 3시 40분 경 용두리장터에서 일어났다. 판결문과 경찰, 헌병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는 이렇게 전개된다. 단월면 덕수리 출신 신재원(당시 60세) 지사와 단월면 향소리에 사는 정경시(당시 65세, 본적은 양동면 쌍학리) 두 지사는 청운면, 단월면 등지에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청운면 용두리장터로 가는 도중 단월면 부안리에 사는 김종학(당시 44세) 지사와 청운면 갈운리에 사는 민주혁(당시 50세) 두 지사를 만난다. 이에 만세운동의 목적을 알리고 권유하자 두 사람 모두 함께하기로 동의한다. 4명은 함께 여물리에 있는 다리 아래로 가서 밀담을 나눈 후 신재원 지사가 준비해 온 목면으로 깃발 3개를 만들고 거기에 김종학 지사가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글씨를 쓴다. 그 깃발 중 하나는 민주혁 지사가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할 목적으로 가슴에 품고 나머지는 신재원 지사, 김종학 지사가 하나씩 들고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에 도착한다. 이때 장터에 모여 있던 15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한다. 총독부와 헌병대 등의 보고서에는 용두리장터 시위는 천도교도가 중심이었고 학생과 예수교도, 보통민(일반인) 등이 참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폭행 등 폭력행위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3명을 강제 연행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이는 시위대가 시가행진을 하고 헌병과 충돌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구속된 네 명의 지사와 3월 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단월면 부안리 출신 곽영준(당시 21세) 지사 등은 모두 천도교도이다. 천도교 자료상으로 신재원은 천도교 양평교구 교구장이고 민주혁은 전교사(傳敎師)다. 곽영준 지사는 3·1운동 뒤 공선원(共宣員)에 피선된다. 나머지 두 분은 문서상 확인되지는 않는다(정용서의 글 <양평지역 3·1운동과 천도교> 참조). 향토사학자 이복재 선생은 "정경시 지사는 유림"이라고 확언한다. 정경시 선생 유사(遺事)를 보면 이 분은 독특한 삶을 산 분이다. 30대 때는 세 번이나 과거시험을 봤고 50대 때는 보통학교와 의숙(義塾)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65세 때 용두리장터 시위 주도, 67세 때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혐의 등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치열한 삶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가 단월면 향소리로 이사한 것은 1916년이었다. 향소리는 신재원 지사가 살고 있던 덕수리와 인접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궁금한 것은 천도교도냐 아니냐 보다 청운면 용두리 시위와 천도교 중앙과의 연계 여부다. 천도교 전체 차원에서 어떤 결의와 지시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고 간접적 정황은 많다. 3·1운동 준비 및 실행과정에 많은 천도교도들이 시위를 조직하거나 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그것이다(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을 냈던 천도교는 14명의 민족대표가 구속되고 1명은 도중에 사망하는 피해를 입는다. 3·1운동 뒤 천도교는 엄청난 탄압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이런 것을 볼 때 용두리장터 시위는 우연히 만나 결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한 것이 틀림없다. 이들 네 지사의 판결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피고 등은 천도교 교도로서 동교 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경성 기타 조선 각 지역에서 조선독립운동이 발발하고 있음을 들어 알자 피고 신재원, 정경시는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3월 23일 용두리 장날 만세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두 지사의 상고 이유를 읽어보면 이 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거사를 일으켰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글이 길어지니 부득이 이쯤에서 줄인다. 사진1: 3·1운동 당시 용두리 지도.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사진이다. 사진2: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아도총차랑(兒島惣次郞) 조선헌병사령관(朝鮮憲兵隊司令官) 보고서. 사진3: 여물리와 용두리를 잇는 여물교. 아마도 이 위치에 옛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4: 여물교 전경. 사진5: 용두리 삼거리 사진6: 단월면 덕수리 점골에 있는 신재원 지사 집터. 사진7: 향소리 교차로 모습. 정경시 선생이 1916년부터 1921년까지 거주한 향소리 사진8: 단월면 부안리 김종학 지사의 옛 집터. .
-
화장장, “내 동네는 절대 안돼?”
화장장, “내 동네는 절대 안돼?” 양평군이 70억을 투입해 오는 2023년 준공을 목표로 공설화장장을 추진한다. 좋은양평이제두 이에 따라 지난 7월, 지역대표와 전문가등이 참여한 ‘양평군 공설화장시설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10월26일부터 12월15일까지 공설화장시설의 최적 입지선정을 위한 건립후보지를 공개 모집하고 있다. 양평군에서는 이에 앞서 20여년 전부터 선출직에 출마하려는 후보는 물론, 양평군에서도 몇 차례에 걸쳐 화장장 건립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번번이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다. 화장장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내 동네는 절대 안돼!”라는 님비현상 때문이다. 이번에 양평군이 추진하는 공설화장시설은 부지면적 3만㎡ 내외로 화장시설(화장로5기, 연면적 3천㎡), 봉안시설, 자연장지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건립후보지 유치신청은 건립후보지 해당지역의 총 세대주 60%이상 찬성지역의 대표자가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최종후보지로 선정된 마을에는 마을발전기금 60억원(연차적지원)과 화장시설부대시설(식당, 매점, 장례용품 판매점, 카페 등)의 운영권 부여, 화장시설규모에 맞는 기간근로제 우선 채용 등의 인센티브가 제공되며, 유치지역 해당 읍·면민에 대해서는 화장수수료가 면제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장시설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전국 화장률은 지난 2014년 79.2%에서 2019년 88.4%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양평군의 화장률도 2014년 77.1%, 2018년 85.8%로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그러나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의 화장시설은 55개소에서 60개소로 5개소 증가하는데 그쳤다. 화장장수수료도 관내와 관외를 구분해 심하게 차등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성남시 화장장의 경우, 관내 주민은 5만원, 관외 사람들에게는 20배인 100만원을 받고 있다. 다른 지역 화장시설도 비슷한 수준이다. 양평군민들도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 원정화장을 치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원주, 성남, 춘천지역 화장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 양평군이 이번에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공설화장시설 등과 같은 혐오시설은 혜택은 전체가 골고루 누리지만, 부담은 주변 지역주민들에게 집중되는 게 혐오시설의 특징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가 사는 지역에 이러한 시설이 들어서는 데에는 반대하는 님비(NIMBY)현상을 넘어, 오히려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수익성 사업을, 자신의 지역에 유치하고자 하는 핌비(PIMBY)현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 기왕에 화장장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화장장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드리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이와 함께 20년 해묵은 사업을 추진하는데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추진하기 바란다. 좋은양평이제두 칼럼
-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3-(양평읍1) 양평읍(당시 갈산면) 양근리 만세시위는 3월 24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이날은 양평장날이었다.하루 전 경성(京城)을 출발해 양평에 온 연희전문학교 서기(書記) 이신규(20세)는 양근리장터 큰 도로에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 앞으로 다가가 연설을 시작한다."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틈 타 일본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다."대략 이러한 요지를 연설을 마친 그는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 명의로 된 <격문(檄文)> 수십 매를 품에서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격문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었다. "독립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의 깃발을 높이 올려 형벌 중에 있는 형제, 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촌단(寸斷)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자.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의 깃발을 나부끼며 용기 있게 일어나 독립하자!" 그런 뒤 이신규는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군중이 제각각 태극기를 꺼내더니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이때 용문면 삼성리에 사는 곽영준(21세)이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이신규를 돕는다(이신규와 곽영준은 가까운 친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최소한 미리 약속하고 움직였을 수도 있다. 천도교도인 곽영준은 전날(23일) 청운면 용두리장터 시위를 이끈 신재원의 사위이기도 하다. 곽영준은 단월면 부안리에서 태어났다).약 1,000명의 군중은 점차 열광적으로 바뀌어 갔고 이신규와 곽영준이 이끄는 대로 시장 안을 행진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시위가 무르익어 갈 즈음(오후 2시 40분 경) 일본 헌병 스즈키(鈴木)가 나타나 이신규와 곽영준을 체포해서 양평헌병분견소로 끌고가는 사태가 벌어진다.이에 격앙된 군중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헌병 한 명이 총을 겨눴다. 분견소 안으로 들어갔던 군중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한편 이날 집회에 동참했다가 크게 공감한 400여 명의 시위대는 자전거수리업을 하는 한창호(23세), 농업인 김경성(32세), 우편소사무원 서상석(19세), 요리점직원 김석봉(20세), 농업인 한봉철(22세. 이 분은 훗날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한다), 농업인 이용준(37세) 등이 선두가 되어 양평군청과 갈산면사무소, 양평우편소, 헌병분견소 등을 돌며 계속 시위를 벌인다.군청에는 약 50명의 시위대가 밀고들어갔으나 군수가 자리를 피해 도망간 것을 알자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갈산면사무소(현 양평읍사무소)로 이동해 면장 김찬제를 밖으로 끌어낸다. 면사무소에는 20~30명이 들어갔다(이들은 면장과 면서기 서병일에게 함께 만세 부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증인들은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 유리창 일부가 파손되고 면장 김찬제가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후 5시 경 의사로 추정되는 박희영의 집에 가서 군수와 면장을 찾아봤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신현은의 집으로 몰려간다. 결국 그곳에서 피신해 있던 군수와 면장을 찾아낸다. 그러자 시위대는 이 둘을 앞세우고 다시 헌병분견소로 간다(아마도 체포되어 구금된 이신규와 곽영준을 풀어달라는 요청에 군수와 면장을 앞세울 요량이었을 것이다).그러나 헌병들의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헌병들은 "고압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여기서 '고압적'이라는 것은 총검을 사용한 무력 진압을 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0여 명이 체포됐으며 그중 7명이 구속된다(이용준 지사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몰래 귀국해 전북 전주군 삼례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당일 사망한 사람은 2명이다. "친일 경찰 원수연이 양서면 정아무개 씨 포함 2명을 사살했다. 원수연은 친일한 공로로 광주(廣州)경찰서장을 역임하고 그 동생은 양평우체국장을 지냈다."(<양평3ㆍ1운동사> 132쪽 참조함).이날 시위는 저녁 늦게서야 끝났다. 한창호 지사의 판결문에는 이날 만세시위 참가자 수가 들쭉날쭉이다.곽영준 지사 부분에선 약 2,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쳤다 하고 한봉철 지사 부분에선 약 3,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치고 광분했다는 식이다. 어쨌든 이날 시위에는 성미(봉성리 마을), 원당리(현 원덕리), 회현리, 창대리, 오빈리, 도곡리 등 갈산면 각 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이 참가했다고 전한다.3월 24일 양근리 만세시위를 이끈 위 지사들의 면면에 대해서는 부득이 다음 회로 미룬다. 사진1. 당시 주요 시위지를 표시한 지도. 현재 위치와 많이 다르다. 헌병분견소 자리에는 양평경찰서가 있고 갈산면사무소 자리에는 양평군청이 있다.위 지도에 나오는 군청 자리는 현재 양평역 인근이고 우편소 자리는 양일고 인근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 지도의 정확성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판결문 중에는 우시장 인근에 갈산면사무소가 있다고 나온다. 사진2. 양평물맑은시장 안에 옛 양근리 장터가 있다. 사진3. 현재의 양평장터. 사진4. 옛 양근리장터 옆 큰길. 이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5. 큰길과 옛 장터를 잇는 길. 사진6. 양평삼거리. 사진7. 이신규, 곽영준 등의 판결문. 사진8.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보고서. 양평군 갈산면 만세시위 관련 부분.
-
- 뉴스
- 문화
- 문화일반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실시간 기고 기사
-
-
신순봉의 양평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2(서종면)
- 신순봉의 양평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2양평지역3·1만세운동-1-(서종면1) 양평에서 3·1만세시위가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은 서종면이다. 3월 10일에 일어났다.서종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장터 시위를 이끈 천주교인 백낙기, 최학순 그룹이고 두 번째는 3월 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장터 만세시위를 공동으로 준비한 김영일, 김민현, 박중빈, 서정봉 등 그룹이다. (이번 첫 회는 문호리장터 시위에 대해 소개하고 두 번째 그룹의 행동은 다음번에 소개하기로 한다).비교적 일찍 서종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우선 한 가지를 꼽자면 주도자들이 천주교인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려졌다시피 3.1만세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세력이 주도했고 민족대표 33인은 이 세 종교의 지도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보다시피 천주교는 참여하지 않았다.그런데 서종에서는 천주교인이 주도했다.그렇다면 이것은 아마도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자발적 결의였을 가능성이 높다.당시 서종면 일대는 1907년에서 1910년까지 전개된 정미의병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익히 알려졌듯이 화서 이항로(1792~1868) 선생의 위정척사 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지역이었다.게다가 문호리나루터를 끼고 있어 한양과의 교류가 빈번하고 이 때문에 한양 소식을 빠르게 접하는 잇점이 있었다.이러한 요인들과 일찍부터 전파된 천주교 사상에 힘입어 천주교인들이 그 중심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문호리에 사는 천주교인 백낙기, 최학순(1895~?) 등이 사발통문을 돌려 주민들의 중지를 모았다 한다. "백낙기, 최학순 등은 천주교도로 지역 주민들을 규합해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문호리 소재 문상학교(현 서종초등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중략- 이날 시위군중은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날이 저물도록 독립만세 소리는 계속됐다. 왜경들이 들이닥쳐 총을 쏘며 횃불을 든 주민들 여러 명을 붙잡았다. 최학순은 경찰에 연행되어 양주헌병대(양주헌병분견소일 가능성이 높다)에 넘겨지고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일반적으로 장터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시간은 오후 1~2시 경일 터이니 미리 연통(連通)을 받고 온 주민들은 아마 이때쯤 문상학교에 모였을 것이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인일 가능성이 높다(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보고서에는 오후 6시 경 약 2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기도하여 곧바로 헌병이 해산시켰다고 나온다. 참가자는 주로 학생과 보통민(일반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다른 지역의 시위 양상을 보면 대체적으로 주도자 한두 명이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 후 거리행진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서종면 시위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문상학교를 나선 군중들은 우선 길가 바로 옆에 있는 서종면사무소 앞에서 큰 소리로 만세삼창을 또 했을 것이고 어쩌면 면사무소 직원들에게도 참가를 권유하거나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그런 뒤 문호교회 인근 장터를 향해 잠깐 행진을 하고 연설과 만세삼창을 이어갔을 것이다. 문상학교에서 장터까지는 불과 1백m 안팎이다. 그런데 해가 저물 때까지 시위를 이어간 것을 보면 시위대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문호리나루터와 서종우편소, 그리고 주재소 등을 두루 오가며 만세시위를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인용한 문헌을 보면 "왜경들이 들이닥쳐 총을 쏘며" 시위자들을 검거하면서 시위는 끝난다. 그러나 갈산면(현 양평읍) 시위 양상을 보면 이런 경우 양평헌병분견소에 군중들이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최소한 몇 사람이라도 남아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을 가능성 또한 남는다.'왜경(倭警)'은 일제강점기의 일본 경찰(순사)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인용 자료는 이날 시위를 진압한 주체를 왜경이라 했는데 이들이 왜경이었을지 일본군 헌병들이었을지는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헌병사령관 보고서에는 헌병 관할 소요지(憲兵 管轄 騷擾地)라고 기록되어 있다.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朝鮮總督府 警務總監部 高等警察課) 보고서는 "동지[문호](同地[汶湖]) 헌병이 해산시켰다"고 보고하였다. 사진1 사진2 사진3 사진4 사진5 사진6 사진7 사진1: 서종초등학교(옛 문상학교 터). 사진2: 문호교회 앞 사거리. 사진3: 옛 문호교회. 1905년에 건립되어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5년에 다시 지었다. 사진4: 문호교회 앞 도로. 이곳에 문호리 장이 섰다. 사진5: 문호리성당 전경. 3·1운동 당시에는 본당이 아닌 공소(公所)였다. 사진6: 현재의 문호리나루터 모습. 사진7: 3·1운동 당시 문호리 부분 지도.
-
- 오피니언
- 기고
-
신순봉의 양평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2(서종면)
-
-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1
- 신순봉의 양평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1 신순봉 양평지역3ㆍ1만세 운동에 대해 10회에 걸쳐 양평군 지역별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서, 지역 곳곳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높이고 '살아 있는' 양평의 3ㆍ1만세 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양평에서 살았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양평의 선조들의 옛 모습을 보면서 잠깐잠깐 바쁜 삶을 쉬어가면서 이 글이 쉼표의 역할이 됐으면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합니다. <오!양평뉴스 발행인 한우진> <양평지역 3·1만세운동> 연재를 준비하며 양평지역 3·1만세운동 관련 자료 검토를 마쳤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자료까지 대략 살폈다. 그런데 세 가지 난관에 빠졌다. 첫 번째는 명칭(名稱)이다. 1919년 3월 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 시위를 이끈 지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신규 지사의 판결문에는 헌병분견소라고 나오는데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소재 양서면사무소 앞 시위를 이끈 최대현 지사의 판결문에는 같은 동리(도곡리)의 헌병주재소라고 표기되어 있다. 양평헌병분견소만 하더라도 그렇다. 예를 들자면 ㅇㅇ헌병대 양평분견소인지 그냥 양근리분견소인지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다. 두 번째는 지명(地名)이다. 4월 3일 고읍면(현 옥천면) 시위는 창리(蒼里)에서 시작되는데 창리가 지금의 어디냐는 것이다. 현재의 옥천리에는 창말, 모래여울, 창촌, 사창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는 예전에 사탄리(沙灘里)라 불렸던 동네라고 한다. 그런데 사탄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월리, 교촌리, 사탄리의 일부가 합쳐지면서 옥천리가 된다. 지명 관련 사전에는 그곳이 옥천리 남쪽이라고 나온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기존의 자료는 대체로 현 옥천면사무소 화단이라고 특정하는데 솔직히 이를 그대로 믿어야 좋을지 망설여진다. 4월 3일 고읍면 시위는 현 양평읍을 향해 행진을 하다가 "동면(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 작은 언덕"에서 헌병들의 총검에 의해 결국 무력으로 해산된다. 마찬가지 문제인데 "작은 언덕"이 어디냐는 것이다. 옹암리와 용암리 일부 또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현 양평읍 오빈리로 통합된다. 그렇다면 오빈리의 새말과 용배미 사이 언덕일까? 새말에 옹기점이 많았고 용배미에 용바위가 있었다니 이렇게 추리해 보는 것이다. 아무튼 이 문제는 현장에 가서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인데 한 가지 우려는 누가 이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사건을 담은 판결문의 기술(記述)이 부정확한 점이다. 3월 31일 밤 11시 경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시작한 시위대는 이튿날인 4월 1일 오전 4시에 도곡리 소재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양서면민과 함께 시위를 이어가는데 이들이 어느 나루터를 이용해 강을 건넜는지 기술하고 있지 않다. 기존의 연구 자료들도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도곡리에서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를 건너다니던 나루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부득이 강하면과 양서면을 건너다니던 나루터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는데 확인해 보니 강하면 운심리와 양서면 대심리를 오가던 상심나루터가 있다. 물론 이렇게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앞서 언급한 최대현 판결문에 들어있는 여운긍 지사의 신문조서 중 "양근리의 김성무라는 자에게 용무가 있어서 아신리도선장까지 왔더니, 강하면민들이 집합하여 빈번히 왕래하는 사람을 조사하며 자기에게 동행하라"고 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는 강하면민들이 4월 3일 고읍면 시위를 위해 아신리도선장을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대심리 상심나루가 도곡리를 왕래하기에 편리하지만 아신리도선장 또한 강하면 시위대가 도강에 이용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시위대의 이동 과정을 특정해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어려움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실 이 같은 문제는 판결문이나 기존 연구 자료들이 똑같이 안고 있는 문제다. 그리고 특히 판결문은 순사나 헌병들의 시위 진압과정을 전혀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보니 그것에 근거해 연구한 자료들 또한 그 부분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나 연구가 부족하다. 아무튼 이 같은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내 나름대로 양평의 3·1만세운동 전개 과정을 취재하면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다. 국가기록원이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자료에 서종면과 양동면, 지평면·개군면 만세시위 관련 판결문이 단 한 건도 없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부득이 <양평3·1운동사>, <서종100년사>, 위키백과 등에서 검색한 내용을 바탕 삼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작가 신순봉 *전 머니투데이 대학경제 선임기자 *전 북토피아닷컴 편집주간 *전 내일신문 기자 신순봉의 세상이야기 https://blog.naver.com/soonbong1404
-
- 오피니언
- 기고
-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