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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공사 부채 350억 군민의 혈세로 상환
양평공사 부채 350억 군민의 혈세로 상환“무능, 무지. 무책임, 고소, 고발로 얼룩져버린 양평공사” 김덕수이사장 “양평공사의 부실경영 군민에게 책임전가” 양평공사는 농산물 유통, 환경기초시설 운영, 관광지 조성·관리, 체육시설 조성·관리 등이 주요 사업이다. 그러나 부실 경영으로 2019년 말 기준 누적 결손금은 332억원, 자본잠식률은 90.2%에 달했다. 양평군 관계자는 양평공사에서 적자 폭이 큰 친환경농산물 유통 분야를 양평농협에 넘기고 나머지 분야는 시설관리공단을 설립해 업무를 이관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의회에서 반대해 차질을 빚게 됐다"며 탓을 돌리고 있다. 이여서 “그동안의 양평공사의 부채를 양평군에서 상환하게 된 상황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다. 말도 안 되며 한심한 얘기다. 무엇이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지 이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또한 이들이 공사에서 공단으로 전환하려고 왜 애쓰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누구를 위한 양평군이고 누구를 위한 양평공사인가?” 공사와 공단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공통사항은 국가가 최대의 주를 보유하고, 공공성의 목적을 갖는다. 차이점은 공사는 공공성과 이익창출 두가지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공익적 경제수요를 충족하는 것이다. 정부가 출자한 자본에 따라 정부투자기관(50%이상), 정부출자기관(50%이하)로 나뉘지며 전자에는 한국전력, 한국도로공사 등이며 후자는 가스공사, 인천국제공항, 한국전력기술공사 등이 있다. 공단은 국가행정기관이 하는 사업 중 특수하거나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법인화된 행정기관)를 하며 이익보다 공익적 행정의 효율성을 목적으로 한다. 정부의 비대를 막고 행정의 효율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건설교통부 산하 교통안전공단,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보험공단과 국민연금공단이 있다. 양평공사를 공단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뻔하다. 군의 입장에서는 능력의 한계를 표출한 것이고 공사 관계자들은 수익사업 안 하고 관리만 하고 돈만 받고 싶은 것이다. 수익사업 하기에는 능력이 없고 그냥 관리만 하면서 월급 받는 정년이 보장된 요즘 말로 개꿀인 것이다. 그동안의 누적된 빚(350억원 중 150억은 작년에 이미 상환 함)은 군민의 세금으로 변제하고 나면 공단으로 전환해서 그 직원 그대로 그 사장 그대로 이어간다는 것에 군민들이 납득이 가겠는지 묻고 싶다. 부패는 부패를 낳는다. 이름만 바뀌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군수의 임기가 다 되어가는 4년 차에 고작 공사에서 공단 전환이라는 정책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첫째, 무능경영자의 부실경영. 양평공사 사장 박윤희의 자질도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성남 정치인을 낙하산 인사로 임명한 사유를 양평군수는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낙하산 인사가 왠 말인가? 전문성도 없는 인사를 사업체인 양평공사 사장으로 취임시키고 끊임없는 지역 불난의 불씨가 되고 있다. 양평공사 사장이 군의원을 고소하고, 사장의 무능함과 사건화된 문제에 대해 양평군의회에서 공사 사장 직위해제를 의결해서 군수에게 보냈는데 아직도 아무 조치도 안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이 의원을 고소하는 촌극을 일삼는 사장을 두둔하고 인사 조치를 안 하고 있는 무능 행정은 군민들을 무시하는 행위로 밖에 볼 수 없다. 양평군과 공사 사장이 유능 했으면 지금의 이모양 이꼴이 되었겠는가?도대체 누구를 위한 군정이고 양평공사인가? 둘째, 모두 갈아치우자! 양평공사 나름대로 ‘경영혁신’이라는 공모전까지 기획했다면 공단 전환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에서의 ‘혁신’이 맞는 것이지 새로 이사 간 집에서 무슨 혁신을 한다는 것 인가? 그리고 양평공사의 “경영혁신”은 지금의 비(非)전문경영진들이 사퇴하고 새로운 전문경영인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이 “혁신의 시작”이다. 지금의 양평공사를 낳은 장본인들 모두 윗선들이다. 말단 직원들은 일만 한 죄이다. 윗선은 부서장 위부터가 윗선들이다. 소신(所信) 것 일하면 안 되는 회사분위기가 지금의 사단(事端)을 초래했다. 그런 점에서 양평군과 양평공사는 닮은 점이 많다. 첫째 사업(군정)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둘째 유능한 직원을 활용 못하고(인사관리), 셋째 리더쉽의 부재이다. 지금부터라도 양심선언 좀 하자. 양평공사가 정상인가? 능력이 없으면 물러나야 한다. 왜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남에게 전가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빚은 빚대로 군민의 세금으로 탕감하는 것 자체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비상식적이지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사에서 공단으로 전환하는 것이 이치에 옳다고 생각하는가! 13년이라는 세월 속 우여곡절 끝에 양평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온다. 다행이다. 양평공사는 누구의 것도 아닌 군민의 것이다. 설립비용이 군민의 세금으로 설립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에 “너희 월급(세금)은 우리가 준다.”라는 말이 있다. 공무원들도 세금 내고 있으니 자기도 군민이라고 한다. 틀리지 않다. 하지만 세금으로 월급 받는 금액에서 세금을 내니 조금은 온도 차이가 있다. 말장난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공무원은 군민을 대신해서 양평군의 군정을 위탁받은 자들이다. 이 점은 명심해두자 예산을 즉, 돈을 집행한다고 해서 ‘갑’은 아니다. 군정 예산의 출처는 분명 군민의 세금이다. 간혹 망각하거나 착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군수도 선출직으써 군민을 대표해 임기 동안 군정을 위탁받은 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양평공사 임·직원 모두 지역을 위해 일해야 하는 목적이 있다. 정관에도 있는 내용이다. 옳다고 생각하면 말단 직원이라도 직언해야 한다. 소명의식을 갖자. 몇 년 동안의 누적적자임에도 퇴직금과 월급은 정해진 날짜에 지급되었을 것이다. 셋째, 결론적으로 “양평공사는 존속”되어야 한다. 얼마든지 양평공사는 회생 가능성이 열려있다. 현재 양평은 5,000세대 아파트가 건설 중이고 도시개발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 양평공사가 도시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수익사업을 할 수 있고 그 수익으로 부채를 충분히 갚을 수도 있는데 위기를 기회로 삼지 않고 그저 공단 전환이라는 정책 카드는 일을 안 하겠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농산물유통사업분야를 양평농협으로 이관된 지금의 양평공사는 시설관리 공단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공단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명분은 유통 분야의 30명 고용 승계와 부채 청산인데 공사에서 도시개발을 특화사업으로 전환 시키면 30명 고용승계도 되고 수익사업을 통해 부채도 청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양동면의 공단시설, 물류단지도 공사를 통해 할 수 있다. 지역의 아파트 건설도 공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데 무조건 안 된다는 사고를 가진 무능한 공사의 경영진을 교체하고 새롭게 경영혁신 할 수 있는 인재를 철저한 검증을 통해 외부에서 영입해야 공사가 새롭게 태어난다. 구구절절 할 말은 많이 있지만 말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 초심으로 돌아가자. 처음 입사 때 일을 기억하자. 정말 진심으로 양심에 호소하고 바른길을 찾기 위해 함께 하자. 이제 그동안의 일보다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자.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각자 잘 알고 있다. 내려 놓으면 편해진다. 현명한 판단이 기다려지는 나날이다. 양평공사 정상화를 위한 “인디언의 기우제”도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All Life 평생양평”<양평경제발전연구소 이사장 김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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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무현대통령,비겁한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비겁한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는냐는 질문에 공자(孔子)는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말했다. 임금은 임금처럼, 신하는 신하 처럼,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로 각자의 본분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양평군에 이를 적용하면 군수는 군수답게 하고 공직자는 공직자답게 언론은 언론답게 군민은 군민답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18년 양평군은 경천동지할 개벽을 맞이하였다. 깃발만 꽂아도 보수당 출신 후보는 당선된다는 경기도의 경북이라 비아냥 받던 양평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민주당 후보가 군수에 올랐다. 양평군민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양평의 보수세력들을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주며 개혁을 요구했지만 군민은 개혁과 다름을 선택했다. 군민이 바라는 건 ‘바르고 공정한 행복한 양평’이다. 장고 끝에 악수둔다고 했다! 이번 사무관승진인사에서 지나치게 뜸을 들여 많은 사람의 진을 뺐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다! 기회비용이라고' 하나를 선택하면 선택에 대한 비용이 발생'한다는 뜻으로 코드인사도 좋고 발탁인사도 좋지만 인사에 대한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지난 3년간 군수비서실장 출신이 4명 전부 사무관에 진급했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 1년6개월 비서실에 근무하면 사무관 승진은 당연시 되고 비서실장은 사무관 승진의 0순위라는 등식이 성립 됐다. 총무팀장이나 기획팀장보다 1순위 인것이다. 인사는 군수의 고유권한이다. 4배수 내에서 누구를 선택하든 군수의 의지다. 정군수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코드인사에 대해 부언할 수 없지만 충언할 수는 있다. 임명권자는 지도자로서 군민이나 공직자들에게 승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박근혜정부의 최순실처럼 정동균군수 인사도 정동균 군수의 최순실이 인사를 했다는 소문이 있다.이번 인사는 89년에서 93년 임명돤 직원으로 연공서열과 발탁으로 인사를 한것 처럼 비추어지는데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에 대해 군민과 공직자들에게 설명이 필요하다. 인사청문회는 아니더라도 군수가 나는 이런 이유로 이런 사람들을 승진시켰다는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하다. 특정학교의 누가 누구의 인맥으로 승진 되었다는 복도 통신이 아닌 양평군이공식적으로 승진 이유를 명확히 밝히면 승진한 사람이나 승진에서 배제 된 사람이나 이해할 것이다. 바르고 공정한 인사가 되지 않으면 조직과 자신을 위해 전력 투구한 승진에 배제된 공직자에게는 쓰라림과 패배했다는 자괴감을 안겨주는 간접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인사는 예측이다! 군수의 군정 철학에 따라 어떻게 하면 승진 될 수 있다는 공정한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 노무현 전대통령"권력을 나누는 수직적 피라미드가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로서 상호의 토론과 협력을 통해서 민주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새로운 정치모델을 한 번 만들어 보이겠습니다"하였듯 정군수 역시 수평적네트워크을 가동해서 바르고 공정한 인사를 해야 한다. 일각에서 정동균군수 인사가 아닌 최순실 인사라는 말도 한다.이런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뚜렷한 인사의 기준을 가지고 엄격하게 적용해야한다.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바르고 공정한 인사가 되기 바란다. 지난 수 십 년간 누적된 악습이나 쏠림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정동균 군수는 ‘우보천리’라 했다. 4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지속적으로 개혁한다고 했다.. 3년 전이나 현재나 군민은 정동균군수의 성공을 바란다. 정동균군수의 성공적인 군정운영이 양평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양평군민은 2018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양평군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 민주당의 정동균 군수를 선택했다. 정동균 양평군수에게 바란다. 정동균군수가 가장 잘하는 것! 군민의 소리를 듣는 것! 군민의 눈 높이에 맞추는 눈 높이의 바른정치(正治)를 하기 바란다. 바라건대 정치라는 것은 생물이고 정치는 상대가 있다. 나에게는 정의지만 상대방에게는 불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양평의 개혁을 위해 무쏘의 뿔처럼 우보천리하기 바란다. 정치는 우군도 많지만 나를 흠집내고 끌어내려는 적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정동균 군수가 슬로건으로 내건 ‘바르고 공정한 행복한 양평’을 가슴에 새기며 성공한 군수 양평군민과 함께한 군수로 군민의 기억에 남기 바란다. E.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 역사학이다. 정동균군수가 초심의 마음으로 마무리해야 다음을 기약 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기 바란다. 끝 발행인 한우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2002년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선언 연설문! .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2002년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선언 연설문! 어느 때부터인가 제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무엇을 했느냐를 묻지 않고, 무엇을 하겠느냐, 비전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비전을 생각해 봤습니다. 제 마음에 가장 드는 비전, 그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5공 때 내놓았던 '정의로운 사회'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내놓았던 '보통 사람의 시대'도 상당히 매력있는 비전이었습니다. '신한국, 세계화, 정보화, 개혁' 문민정부의 비전도 참 좋았습니다. 저는 국민의 정부의 비전은 달달 욉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 남북화해, 노사협력, 지식기반사회… 저도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제 가슴은 공허합니다. 그 말을 누가 못하냐. 누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는 유종근 전북지사가 지으신 '유종근의 신 국가론'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신뢰, 협동이라는 이 사회적 자본을 한국이 제대로 구축 하느냐 못 하느냐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앞으로 사회적 시대의 생산성은 생산요소의 투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혁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토대가 되는 사회적 신뢰를 어떻게 구축해가느냐 여기에 달려있다.'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가 씌여 있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문제는 그 사회적 신뢰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입니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 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 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저희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저희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저는 민주당의 후보가 되는 순간 국민들에게 정계 개편을 제안할 것입니다. 지금의 이 정치구도로서는 싸움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지역끼리 싸우니까 국회의원들도 국회에 가면 지역끼리 싸워야 합니다. 싸우지 않는 국회의원은 자기 고향에서 인기가 떨어집니다.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지역구도를 해체하고 이념과 정책에 의해서 당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는 이 왜곡된 정치구도를 헐어버리고 국민을 위해서 진정한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책에 의해서 당당하게 경계하고, 인물에 의해서 평가받는 정상적 정치를 만들어가는 정계의 재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의 순리에 맞습니다. 이 정계 개편은 옛날 권력이 하던 정계 개편과는 달리, 뒷방에서 겁주고 돈주고 숙덕숙덕하면서 밤중에 야반도주하듯이 보따리 싸들고 이당저당으로 도망가는 그와 같은 정계 개편이 아니라, 당당하게 국민들에게 제안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그리고 그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서 지역의 유권자들이 명령하는 대로 국회의원들이 당당히 자기가 가야할 곳을 찾아가는 정정당당한 정계 개편이 될 것입니다. 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남북 대화와 화해를 지시하는데 이회창 총재는 사사건건 남북대화를 반대하는 냉전주의를 가지고 있다. 가슴을 칠 일입니다. 한날 하루라도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이회창 총재와 함께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많은 개혁적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명분과 기회가 주어지고 국민의 지지가 모아진다고 하면 왜 움직일 수 없겠습니까? 정계 개편하면서 지방자치 선거도 치르고, 정계 개편 완성하면서 대통령 선거도 치르고, 2003년 2월 새 정부가 출범할 때에는 우리 민주당이 여대 국회로서, 안정된 정치적 토대 위에서 이제 본격적인 개혁을 그리고 본격적인 남북대화를 진행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정당으로, 그런 정부로 새롭게 출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1년전에도 했고, 올해도 하고, 내년에도 해야 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집에 청소하듯이 조금씩 조금씩 개량해야 되는 일이라면 저는 모든 것을 총리에게 맡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아직 과거에 주먹으로 해결하던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해소와 조정을, 문제를 직접 관여해야 합니다. 행정개혁과 재정개혁이라는 이 중요한 문제, 그리고 전략적 사업과제, 이런 문제만 전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권력을 나누는 수직적 피라미드가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로서 상호의 토론과 협력을 통해서 민주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새로운 정치모델을 한 번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여러차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그렇게 선언을 했는데, 아직 공식이 아니라고 보는가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공식 선언 하냐고 자꾸 묻길래, 공식한 공식이 어디 있나고 그랬더니, 공식으로 해야 신문에 써 준대요. 그래서 오늘, 제 오늘 이 얘기를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는 공식 선언으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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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균군수에게 바란다!
정동균군수에게 바란다!”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 민선7기 정동균 군수가 취임한지 어느덧 3년의 세월이 지나간다. 보수의 텃밭이라 불리는 경기도 내의 경북인 ’양평‘에서 민주당의 깃발을 세우고 당당히 보수를 물리치고 군수에 올랐다. 정병국 전국회의원이 20년간 이루지 못한 용문산사격장 이전 계획 및 서울-양평고속도로 예타 통과와 2024년까지 아파트 5,000세대 입주 및 인구 증가 등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것을 이뤘다. 당태종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李淵,당 고조)을 도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그는 태자인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피로 얼룩진 황좌에 올랐고 중국 역사상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치세를 이뤘다. 중국 역사에 대표적인 인물로 당태종을 도와 당나라의 명신이었던 위징만 한 인물이 없었다.위징은 수나라 출신으로 당 고조 이연에게 발탁되어 당시 황태자였던 건성 아래에서 활동한 인물이다.위징은 태자 이건성에게 이세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황권 확보를 위해 동생 이세민을 제거할 것을 요구 했지만 태자이건성의 우유부단으로 당태종 이세민을 제거하지 못했다. 정변 후 당태종은 “너는 무엇 때문에 우리 형제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인가?”에 대해 위징은 ‘사람에겐 누구나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만일 태자께서 제말을 들었다면 오늘 같은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건성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관중도 제환공의 허리띠를 활로 쏘아 맞힌 적이 있지 않은가?“라 했다. 당태종 이세민은 위징의 기개를 높이 사 측근으로 중용했으며, 이후로도 위징은 당 태종에게 서슴지 않고 충언을 올려 재상의 자리에 올라 활약했다. 당 태종의 치적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 위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고 임금은 그 직언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군신 관계 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좋은 신하는 군주의 명성을 빛내고, 충신(忠臣)은 이름만 남기고 죽는다!위징이 ”윗사람들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복종하지 않는 법입니다.“위징은 순자(荀子)의 말을 인용하면서 간언을 계속했다.”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입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하지요.“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貞觀)의 치(治)’가 가능했던 것은 직언을 서슴치 않는 위징과 직언에 항상 귀 기울이는 충언에 목마른 당태종의 큰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를 이뤘듯 정동균군수가 ‘정동균의 치’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소리를 듣고 계획해야 할 것이다. 정 군수의 우보천리와 신중함에 대해 일부에서는 결정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한다. 양평군에 많은 시민단체가 있고 관변 단체가 있지만 누구하나 정동균군수에게 직언하는 곳이 없는 듯 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직언하는 곳이 없다. 2024년이면 양평읍내에 5,000세대가 입주 예정이고 신축 중인 연립 포함 약 6,000세대가 입주 예정이다. 1가구당 세대원수 3명으로 계산하면 약 18,000명의 인구가 증가 할 것으로 예측 된다. 전국적으로 인구 감소가 예상되는 가운데 양평군에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준비 되지 않은 개발로 인해 원주민들의 삶의 급격하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 된다. 당장 교육 현실은 양평초등학교에 체육관을 허물어 급식실 및 교실을 증축하고 체육관을 1층에서 4층으로 옮긴다고 한다. 학교는 과대학교, 교실은 과밀학급이고 아이들 운동장은 줄어들고 증축되는 교실로 인해 주차장 증설 또 다시 아이들의 꿈의 운동장을 잠식할 것이다. 양평의 교육을 담당하는 자들과 행정가와 정치를 하는 군수 및 군의원 군수,도의원에게 묻는다?양평초등학교 ,양평중학교 교실 증축이 진정 양평 학생들과 지역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는지?아이들에게 최선인지? 교육 환경이 좋아지는 것인지? 2년간 머무는 나그네 교육장을 비롯 교육 관료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과 자신을 위해 더 좋은 근로 환경을 위해 양평보다 더 좋은 도시로 전근을 희망하고 있을 것이다. 양평군의 지난 2019년 미래비젼 7th에 따르면 교육 때문에 양평에 거주한다는 인구가 1.3%이다. 정동균 군수는 군민의 소리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진중하게 경청해야 한다. 각종 사업과 민원으로 많은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지만 지난번 족구로 다리를 다쳤듯이 이제는 친구들과의 족구보다 언론인과 군민들의 다양한 소리를 경청하기 바란다. 정군수가 일부 소수의 측근들의 말과 언론에만 귀 기울이지 말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듣기를 바란다. 공직자,정치인,언론인,사회단체 등은 모두 양평군이 잘되기를 바란다. 존재 이유 역시 양평군이 있기 때문이고 4년간 정군수에게 지휘봉을 준 이유일 것이다. 언론를 양신으로 만들지 충신으로 만들지 아니면 간신으로 만들지는전적으로 정군수의 행동에 달렸고 내년 6월의 재신임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언필신행불과(言必信行必果)라 했다.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 따른다. 정동균군수에게 언론의 한 사람으로 위징과 같이 묻는다.”폐하께서는 저를 충신이 되게 하지 마시고 양신이 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물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충신(忠臣)과 양신(良臣)에 관한 위징의 변론이다. 위징이 태종의 친척들을 싸잡아 비난했다고 나무랐다. 이에 위증은 ”폐하께서는 저를 충신이 되게 하지 마시고 양신이 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물었다.”대체 충신과 양신이 어떻게 다르다는 게요?“태종은 되물었다.”차이가 매우, 많지요. 양신은 스스로 훌륭한 명성을 누릴 뿐 아니라 군주에게도 훌륭한 위세와 명망을 가져다주어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하는 데 비해 충신은 결국, 미움을 받아 주살 당하기, 십상이고 군주에게는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악명을 남겨주며 나라를 망치지요. 결국, 충신이 얻는 것은 공허한 이름뿐입니다.“위징의 말에 크게 감동한 태종은 연신 그를 칭찬하며 비단 5백 필을 상으로 내렸다.발행인한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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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 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3-(양평읍1) 양평읍(당시 갈산면) 양근리 만세시위는 3월 24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이날은 양평장날이었다.하루 전 경성(京城)을 출발해 양평에 온 연희전문학교 서기(書記) 이신규(20세)는 양근리장터 큰 도로에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 앞으로 다가가 연설을 시작한다."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틈 타 일본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다."대략 이러한 요지를 연설을 마친 그는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 명의로 된 <격문(檄文)> 수십 매를 품에서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격문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었다. "독립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의 깃발을 높이 올려 형벌 중에 있는 형제, 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촌단(寸斷)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자.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의 깃발을 나부끼며 용기 있게 일어나 독립하자!" 그런 뒤 이신규는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군중이 제각각 태극기를 꺼내더니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이때 용문면 삼성리에 사는 곽영준(21세)이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이신규를 돕는다(이신규와 곽영준은 가까운 친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최소한 미리 약속하고 움직였을 수도 있다. 천도교도인 곽영준은 전날(23일) 청운면 용두리장터 시위를 이끈 신재원의 사위이기도 하다. 곽영준은 단월면 부안리에서 태어났다).약 1,000명의 군중은 점차 열광적으로 바뀌어 갔고 이신규와 곽영준이 이끄는 대로 시장 안을 행진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시위가 무르익어 갈 즈음(오후 2시 40분 경) 일본 헌병 스즈키(鈴木)가 나타나 이신규와 곽영준을 체포해서 양평헌병분견소로 끌고가는 사태가 벌어진다.이에 격앙된 군중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헌병 한 명이 총을 겨눴다. 분견소 안으로 들어갔던 군중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한편 이날 집회에 동참했다가 크게 공감한 400여 명의 시위대는 자전거수리업을 하는 한창호(23세), 농업인 김경성(32세), 우편소사무원 서상석(19세), 요리점직원 김석봉(20세), 농업인 한봉철(22세. 이 분은 훗날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한다), 농업인 이용준(37세) 등이 선두가 되어 양평군청과 갈산면사무소, 양평우편소, 헌병분견소 등을 돌며 계속 시위를 벌인다.군청에는 약 50명의 시위대가 밀고들어갔으나 군수가 자리를 피해 도망간 것을 알자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갈산면사무소(현 양평읍사무소)로 이동해 면장 김찬제를 밖으로 끌어낸다. 면사무소에는 20~30명이 들어갔다(이들은 면장과 면서기 서병일에게 함께 만세 부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증인들은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 유리창 일부가 파손되고 면장 김찬제가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후 5시 경 의사로 추정되는 박희영의 집에 가서 군수와 면장을 찾아봤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되돌아 나온다.시위대는 다시 신현은의 집으로 몰려간다. 결국 그곳에서 피신해 있던 군수와 면장을 찾아낸다. 그러자 시위대는 이 둘을 앞세우고 다시 헌병분견소로 간다(아마도 체포되어 구금된 이신규와 곽영준을 풀어달라는 요청에 군수와 면장을 앞세울 요량이었을 것이다).그러나 헌병들의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헌병들은 "고압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여기서 '고압적'이라는 것은 총검을 사용한 무력 진압을 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0여 명이 체포됐으며 그중 7명이 구속된다(이용준 지사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몰래 귀국해 전북 전주군 삼례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당일 사망한 사람은 2명이다. "친일 경찰 원수연이 양서면 정아무개 씨 포함 2명을 사살했다. 원수연은 친일한 공로로 광주(廣州)경찰서장을 역임하고 그 동생은 양평우체국장을 지냈다."(<양평3ㆍ1운동사> 132쪽 참조함).이날 시위는 저녁 늦게서야 끝났다. 한창호 지사의 판결문에는 이날 만세시위 참가자 수가 들쭉날쭉이다.곽영준 지사 부분에선 약 2,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쳤다 하고 한봉철 지사 부분에선 약 3,000명의 군중과 만세를 외치고 광분했다는 식이다. 어쨌든 이날 시위에는 성미(봉성리 마을), 원당리(현 원덕리), 회현리, 창대리, 오빈리, 도곡리 등 갈산면 각 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이 참가했다고 전한다.3월 24일 양근리 만세시위를 이끈 위 지사들의 면면에 대해서는 부득이 다음 회로 미룬다. 사진1. 당시 주요 시위지를 표시한 지도. 현재 위치와 많이 다르다. 헌병분견소 자리에는 양평경찰서가 있고 갈산면사무소 자리에는 양평군청이 있다.위 지도에 나오는 군청 자리는 현재 양평역 인근이고 우편소 자리는 양일고 인근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 지도의 정확성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판결문 중에는 우시장 인근에 갈산면사무소가 있다고 나온다. 사진2. 양평물맑은시장 안에 옛 양근리 장터가 있다. 사진3. 현재의 양평장터. 사진4. 옛 양근리장터 옆 큰길. 이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5. 큰길과 옛 장터를 잇는 길. 사진6. 양평삼거리. 사진7. 이신규, 곽영준 등의 판결문. 사진8.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보고서. 양평군 갈산면 만세시위 관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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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역사 탐방 3·1만세운동 양평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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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 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청운면과 단월면 3·1만세시위는 3월 23일 용두리 장날 오후 3시 40분 경 용두리장터에서 일어났다. 판결문과 경찰, 헌병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는 이렇게 전개된다. 단월면 덕수리 출신 신재원(당시 60세) 지사와 단월면 향소리에 사는 정경시(당시 65세, 본적은 양동면 쌍학리) 두 지사는 청운면, 단월면 등지에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청운면 용두리장터로 가는 도중 단월면 부안리에 사는 김종학(당시 44세) 지사와 청운면 갈운리에 사는 민주혁(당시 50세) 두 지사를 만난다. 이에 만세운동의 목적을 알리고 권유하자 두 사람 모두 함께하기로 동의한다. 4명은 함께 여물리에 있는 다리 아래로 가서 밀담을 나눈 후 신재원 지사가 준비해 온 목면으로 깃발 3개를 만들고 거기에 김종학 지사가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글씨를 쓴다. 그 깃발 중 하나는 민주혁 지사가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할 목적으로 가슴에 품고 나머지는 신재원 지사, 김종학 지사가 하나씩 들고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에 도착한다. 이때 장터에 모여 있던 15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한다. 총독부와 헌병대 등의 보고서에는 용두리장터 시위는 천도교도가 중심이었고 학생과 예수교도, 보통민(일반인) 등이 참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폭행 등 폭력행위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3명을 강제 연행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이는 시위대가 시가행진을 하고 헌병과 충돌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구속된 네 명의 지사와 3월 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단월면 부안리 출신 곽영준(당시 21세) 지사 등은 모두 천도교도이다. 천도교 자료상으로 신재원은 천도교 양평교구 교구장이고 민주혁은 전교사(傳敎師)다. 곽영준 지사는 3·1운동 뒤 공선원(共宣員)에 피선된다. 나머지 두 분은 문서상 확인되지는 않는다(정용서의 글 <양평지역 3·1운동과 천도교> 참조). 향토사학자 이복재 선생은 "정경시 지사는 유림"이라고 확언한다. 정경시 선생 유사(遺事)를 보면 이 분은 독특한 삶을 산 분이다. 30대 때는 세 번이나 과거시험을 봤고 50대 때는 보통학교와 의숙(義塾)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65세 때 용두리장터 시위 주도, 67세 때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혐의 등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치열한 삶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가 단월면 향소리로 이사한 것은 1916년이었다. 향소리는 신재원 지사가 살고 있던 덕수리와 인접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궁금한 것은 천도교도냐 아니냐 보다 청운면 용두리 시위와 천도교 중앙과의 연계 여부다. 천도교 전체 차원에서 어떤 결의와 지시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고 간접적 정황은 많다. 3·1운동 준비 및 실행과정에 많은 천도교도들이 시위를 조직하거나 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그것이다(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을 냈던 천도교는 14명의 민족대표가 구속되고 1명은 도중에 사망하는 피해를 입는다. 3·1운동 뒤 천도교는 엄청난 탄압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이런 것을 볼 때 용두리장터 시위는 우연히 만나 결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한 것이 틀림없다. 이들 네 지사의 판결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피고 등은 천도교 교도로서 동교 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경성 기타 조선 각 지역에서 조선독립운동이 발발하고 있음을 들어 알자 피고 신재원, 정경시는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3월 23일 용두리 장날 만세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두 지사의 상고 이유를 읽어보면 이 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거사를 일으켰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글이 길어지니 부득이 이쯤에서 줄인다. 사진1: 3·1운동 당시 용두리 지도.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사진이다. 사진2: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아도총차랑(兒島惣次郞) 조선헌병사령관(朝鮮憲兵隊司令官) 보고서. 사진3: 여물리와 용두리를 잇는 여물교. 아마도 이 위치에 옛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4: 여물교 전경. 사진5: 용두리 삼거리 사진6: 단월면 덕수리 점골에 있는 신재원 지사 집터. 사진7: 향소리 교차로 모습. 정경시 선생이 1916년부터 1921년까지 거주한 향소리 사진8: 단월면 부안리 김종학 지사의 옛 집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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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 2-(청운면·단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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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균군수 우보천리 통했다!
- 정동균군수 우보천리 통했다! 군민의 간절하고도 오래된 염원 우보천리로 관통했다! 양평-서울고속도로 예비타당성조사 통과는 정동균군수를 중심으로 공직자 정치인 12만 군민이 하나가 되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양평민 전체가 자축해야 할 위대한 업적이다. 양평-서울간 4차선과 전철 개통 후 근 20년 만의 경사다. 5선의 전 국회의원이 20년간 이루지 못한 일을 정동균군수는 취임 3년을 앞두고 군민에게 큰 선물을 선사했다. 서울~양평 고속도로 예비타당성 통과로 국도 6호선의 만성적인 교통정체를 해소하고 경기 동남권 지역의 균형발전을 이룰 것으로 기대 된다. 양평-송파 고속도로 예비타당성 조사는 2018년 8월에 열린 기재부 ‘재정사업평가 자문위원회’에서 선정심사에서 탈락했다. 이어 양평-송파 고속도로는사업연장 26.8km, 사업비 1조 4709억원 규모의 대형 국책사업으로 국토부의 고속도로 건설 5개년 계획에 포함됐으나 민자사업 형태로 검토 되다 다시 국가 재정사업으로 추진되었다 . 전체적인 상황이 비관적이었다. 정동균 군수는 양평-송파 고속도로 예비타당성 통과를 위해 배수진을 쳤다.. 다양한 인적 네트워킹을 활용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수 많은 국회 의원들과 관계부처를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서울-양평 고속도로에 대한 양평군민의 간절한 열망과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피력 했다. 국회나 관계부처에 함께 동행한 공직자에 따르면 정동균군수는 대외인지도는 국회의원 3선급의 대우를 받는 것 같았고 양평 관내보다 국회나 중앙부처에 다양한 인맥 형성으로 담당 국장이나 차관 등을 어렵지 않게 방문하여 양평-송파 고속도로 설명할 수 있었다 한다. 많은 군민들이 과연 가능할까 의심했지만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비용대비 편익(B/C)이 1.0보다 낮아 수익성이 없는데다 양평이 수도권으로 분류되어 평가에 불리한 점이 많았으나 정동균군수는 우보천리로 한 걸음 씩 목표를 향해 나아갔고 이뤘다. 설계 완료 후 이르면 2025년부터 본격적인 보상 및 공사에 착수하게 되며, 2032년 개통을 목표로 사업이 진행된다. 서울-양평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수도권제1순환선과 제2순환선이 방사형으로 연결돼 수도권 동남권 간선 교통체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남양주 동부지역, 하남, 광주 및 양평 지역의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 된다.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 까지 중국의 실질적 지배자로 오늘 날 세계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여 ‘3전 4기’의 부도옹(不倒翁)으로 오뚜기를 수식하는 말이다. 등소평은 “나는 세 번 쓰러지고 네 번 일어난 역전의 용사로서 마지막 정치위기였던 천안문사태의 시련을 견뎌내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 부도옹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가 되었다.”했다. 이번 만큼은 정동균 군수가 양평의 등소평 부도옹이다. 요순시대 격앙가에 해가 뜨면 일하고 日出而作(일출이작) 해가 지면 쉬고 日入而息(일입이식)우물 파서 마시고 鑿井而飮(착정이음) 밭을 갈아 먹으니 耕田而食(경전이식)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帝力于我何有哉(제력우아하유재) 정동균군수가 됐던 김선교의원이 됐든 군민 받들고 비젼제시하고 좋은 일자리 제공하고 등 따습게 하고 배 부르게하는 정치인이 군민에게는 장땡이다. 정치인들은 정권 잡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군민들은 군민이 평안하고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다. 양평에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정의당등이 있고 각 정당은 정권을 잡기위해 노력한다. 당을 초월해서 양평군민 등 따스고 배 부르게하는 정치인이 최고다. 등소평은 말했다 “흰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 없다.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오!양평뉴스 발행인 한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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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균군수 우보천리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