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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 역사탐방 3ㆍ1만세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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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4.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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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봉의 양평역사탐방 31만세운동-1

신순봉 양평지역31만세 운동에 대해 10회에 걸쳐 양평군 지역별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서, 지역 곳곳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높이고 '살아 있는' 양평의 31만세 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양평에서 살았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양평의 선조들의 옛 모습을 보면서 잠깐잠깐 바쁜 삶을 쉬어가면서 이 글이 쉼표의 역할이 됐으면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합니다.

<오!양평뉴스 발행인 한우진>

 

<양평지역 3·1만세운동> 연재를 준비하며

 

양평지역 3·1만세운동 관련 자료 검토를 마쳤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자료까지 대략 살폈다.

그런데 세 가지 난관에 빠졌다.

첫 번째는 명칭(名稱)이다. 1919324일 갈산면(현 양평읍) 양근리 시위를 이끈 지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신규 지사의 판결문에는 헌병분견소라고 나오는데 41일 양서면 도곡리 소재 양서면사무소 앞 시위를 이끈 최대현 지사의 판결문에는 같은 동리(도곡리)의 헌병주재소라고 표기되어 있다.

양평헌병분견소만 하더라도 그렇다. 예를 들자면 ㅇㅇ헌병대 양평분견소인지 그냥 양근리분견소인지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다.

 

두 번째는 지명(地名)이다. 43일 고읍면(현 옥천면) 시위는 창리(蒼里)에서 시작되는데 창리가 지금의 어디냐는 것이다.

현재의 옥천리에는 창말, 모래여울, 창촌, 사창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는 예전에 사탄리(沙灘里)라 불렸던 동네라고 한다.

그런데 사탄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월리, 교촌리, 사탄리의 일부가 합쳐지면서 옥천리가 된다. 지명 관련 사전에는 그곳이 옥천리 남쪽이라고 나온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기존의 자료는 대체로 현 옥천면사무소 화단이라고 특정하는데 솔직히 이를 그대로 믿어야 좋을지 망설여진다.

 

43일 고읍면 시위는 현 양평읍을 향해 행진을 하다가 "동면(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 작은 언덕"에서 헌병들의 총검에 의해 결국 무력으로 해산된다.

마찬가지 문제인데 "작은 언덕"이 어디냐는 것이다. 옹암리와 용암리 일부 또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현 양평읍 오빈리로 통합된다.

그렇다면 오빈리의 새말과 용배미 사이 언덕일까? 새말에 옹기점이 많았고 용배미에 용바위가 있었다니 이렇게 추리해 보는 것이다.

아무튼 이 문제는 현장에 가서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인데 한 가지 우려는 누가 이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사건을 담은 판결문의 기술(記述)이 부정확한 점이다.

331일 밤 11시 경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시작한 시위대는 이튿날인 41일 오전 4시에 도곡리 소재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양서면민과 함께 시위를 이어가는데 이들이 어느 나루터를 이용해 강을 건넜는지 기술하고 있지 않다.

기존의 연구 자료들도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도곡리에서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를 건너다니던 나루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부득이 강하면과 양서면을 건너다니던 나루터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는데 확인해 보니 강하면 운심리와 양서면 대심리를 오가던 상심나루터가 있다.

물론 이렇게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앞서 언급한 최대현 판결문에 들어있는 여운긍 지사의 신문조서 중 "양근리의 김성무라는 자에게 용무가 있어서 아신리도선장까지 왔더니, 강하면민들이 집합하여 빈번히 왕래하는 사람을 조사하며 자기에게 동행하라"고 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는 강하면민들이 43일 고읍면 시위를 위해 아신리도선장을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대심리 상심나루가 도곡리를 왕래하기에 편리하지만 아신리도선장 또한 강하면 시위대가 도강에 이용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시위대의 이동 과정을 특정해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어려움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실 이 같은 문제는 판결문이나 기존 연구 자료들이 똑같이 안고 있는 문제다.

그리고 특히 판결문은 순사나 헌병들의 시위 진압과정을 전혀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보니 그것에 근거해 연구한 자료들 또한 그 부분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나 연구가 부족하다.

아무튼 이 같은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내 나름대로 양평의 3·1만세운동 전개 과정을 취재하면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다.


국가기록원이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자료에 서종면과 양동면, 지평면·개군면 만세시위 관련 판결문이 단 한 건도 없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부득이 <양평3·1운동사>, <서종100년사>, 위키백과 등에서 검색한 내용을 바탕 삼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작가 신순봉 *전 머니투데이 대학경제 선임기자 *전 북토피아닷컴 편집주간 *전 내일신문 기자

신순봉의 세상이야기 https://blog.naver.com/soonbong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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